'제주-베트남-광주' 그 눈물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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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베트남-광주' 그 눈물의 고리

# 가장 끔찍한 것은 12월 12일 잠복한 정부군이 시신을 수습하러 온 사람을 붙잡아 산 채로 화장시킨 ‘잠복 학살사건’이다. 서귀포 정방폭포 위에 있는 소남머리는 4ㆍ3사건의 최대 학살터다. 1948년 11월 24일 이후 여섯 차례 이상 대학살이 자행되고 살인 경험이 없는 사병들의 실습용으로 양민들을 이용했다고 한다. 1949년 1월 22일 무등이왓 사람들 한 살부터 70대 노인까지 86명이 학살됐다.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와 동네 사람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베트남 말이란 겨우 ‘디, 디’라는 말이 전부였다. ‘디’라는 말은 가라는 뜻이다. 그들은 통역관을 데리고 있지 않았다. 군인들은 나이든 남자들과 소년들을 군중들 가운데서 끌어내 한쪽으로 줄을 세운 후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줄 제일 끝에 있던 열세 살짜리 남자아이를 사람들 앞에 세워놓고 한국말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물론 그 아이나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들이 하는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군인들은 아이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총을 쐈다. 그리고 구덩이에 던져버렸다.

# 시위 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는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 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얼굴을 위로 돌리게 해 놓고는 안면을 군홧발로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으며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가 축 늘어지면 걸레 던지듯 트럭 위로 던져 올렸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국군을 파견했다. 자유 베트남을 돕겠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우리 군은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일어난 제주4ㆍ3 등의 사건을 통해 ‘민간인 학살’을 학습한 결과이며, 베트남에서의 학살은 다시 광주에서의 학살로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제주4?3 민간인 학살, 베트남 민간인 학살, 광주 민간인 학살은 결코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앞선 사건을 부정하고 왜곡했기에 연결돼 일어난 사건으로, 하나같이 공산주의자는 무조건 죽여도 좋다는 무의식 속에 무고한 시민을 빨갱이 또는 베트콩으로 몰아 죽이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던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우리나라 와 같은 분단국이 됐다. 다시 식민 지배를 꾀하는 프랑스에 대항해 ‘항불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은 통일된 독립 국가를 이루려 했으나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을 우리는 보통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항미전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비슷한 고통을 안고 있는 베트남에 동병상련을 느끼기는커녕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물론 실질적인 목적은 우리나라의 경제사정과 관련되어 당시 박정희 군부 독재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군은 베트남 대다수 민중의 염원이었던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 군이 저지른 학살은 결코 베트남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병사들은 대부분 해방 전후에 출생했다. 그들은 자라면서 남북분단 상황의 정치적인 논리에 의해 자신들이 겪은 불행이 모두 ‘빨갱이’ 때문에 생긴 일이며, 빨갱이는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사상 교육을 받았다. 

파병 후 전투 현장에 투입된 병사들은 처음에는 베트콩 용의자를 향해 쉽사리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지만, 점차 민간인 학살을 자행할 만큼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혔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국내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크게 나눠 한국전쟁이 전면전에 들어가기 전에 발생한 사건과 전면전 중에 발생한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후에 발생한 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전쟁 전에 발생한 학살로 대표적인 것은 대구 10월항쟁과 제주4ㆍ3항쟁, 여수ㆍ순천 사건 등이다. 이 밖에도 1949년 12월 24일 경북 문경에서 국군이 다수의 노인과 어린이가 포함된 마을 주민 86명을 학살하고 무장공비의 소행으로 은폐한 ‘문경 민간인 학살’, 1950년 4월∼5월 거제도에서 주민 200여 명을 총살 또는 수장시킨 ‘거제도 민간인 학살’ 등 전국에 걸쳐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이 감추어지고 왜곡되면서 베트남에서 또 다시 같은 방법으로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다. 계속되는 군부 독재의 영향으로 베트남에서 저질러진 학살은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베트콩을 잡은 무용담으로 전개되면서 똑같은 사건이 다시 우리나라 광주에서 일어나 무고한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는 일로 되돌아왔다.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물론 광주민중항쟁에 투입된 많은 부사관과 장교들 역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경험을 쌓았던 군인들이다. 

그간 베트남 정부의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공식 입장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보자”로 압축할 수 있다. 베트남 정부는 전쟁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민간인 학살에 관한 어떠한 공식 조사나 사과,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시민단체의 활동 또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혹여 과거사가 개혁 개방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우리 정부도 많은 증거와 증언이 있음에도 공식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의 그러한 입장이 우리가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이유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 일각에서는 이제 베트남 현지에 역사관을 건립해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 한국에 건립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그곳을 찾아오는 한국 학생뿐만 아니라 일본 학생들에게도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처럼 베트남을 방문하는 한국 학생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도 바로 알려야 한다. 끊임없이 일본의 역사 왜곡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역사 화해는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 사이에 인식의 일치가 이뤄져야 가능하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의 진실을 밝히려는 시민단체와 참전 군인들이 유대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어 활동하며 인권단체와 참전군인, 그리고 베트남이 함께 베트남의 슬픔을 먼저 헤아려왔다. 우리 역시 그릇된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베트남전의 진실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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