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여자아이가 쏘아올린 '큰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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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여자아이가 쏘아올린 '큰 공'

앤은 고아였고, 자신 역시 어린이인데도 아기 돌보는 일을 하며 남의 집을 전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커스버트 남매에게 입양되지만, 매슈와 마릴라가 원했던 것은 농장 일을 도울 수 있는 남자아이였지 앤이 아니었다. 그러나 앤은 특유의 명랑함으로 세계를 긍정한다. 어릴 적에는 앤이 이렇듯 굳건한 내면을 지닌 아이인 것을 미처 몰랐다. 앤이 어떻게 자신의 결핍과 당당히 맞서는지, 얼마나 로맨틱한 아이인지를 알 수 있다.

  • 이은진 gdaily4u@gmail.com
  • 등록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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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빨간머리 앤 : 네버엔딩스토리'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빨간머리 앤 : 네버엔딩스토리'의 한 장면
 

<빨강 머리 앤>은 출간과 동시에 사랑을 받아 지금까지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때마다 새로운 해석이 나와 매번 원작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과 입체성이 주목받는다.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저자 마크 트웨인은 빨강 머리 앤을 문학사에 보기 드문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라고 말하며 작가에게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아름답다’는 편지를 남긴다. 앤에게는 지금 보아도 놀라운 현대적 여성성이 깃들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앤은 아마도 1979년 일본 후지TV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속 모습일 것이다. 이 만화영화에서 앤은 창백한 피부에 주근깨가 있는 얼굴, 양갈래로 땋은 머리 사이로 볼록한 이마가 드러난 소녀로 묘사된다.

 

사실 <빨강 머리 앤>을 처음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은 1919년의 흑백 무성영화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 여러 번 각색됐고, 최근에는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빨강 머리 앤>이 방영되면서 더욱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여기에서는 앤이 가지고 있는 결핍과 소수자 감수성을 연결해 현대의 우리에게 더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아울러 원작의 문장을 인용한 에세이들 역시 다수 출판돼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는 등 여전히 앤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다양한 장르로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중심에 앤 셜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앤과 마찬가지로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고, 앤처럼 사물들에 이름을 붙이는 등 상상력이 풍부했던 소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유년기를 <빨강 머리 앤>을 집필하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덕분에 그녀가 성장한 프린스에드워드섬에는 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앤과 커스버트 남매의 집으로 등장하는 그린게이블스 저택은 실제로 몽고메리의 친척집으로 실존하는 공간이며, 현재에도 남아 있어 전 세계에서 앤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개방돼 있다.

 

작품 속에서 앤이 직접 이름 붙인 ‘빛나는 호수’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생가 역시 보존돼 있다. 몽고메리는 이곳에서 늘 책을 읽고 상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글쓰기를 가장 좋아했고 작품 이외에도 일기를 쓰거나 신문과 잡지에 글을 투고를 하기도 했다.

 

교육을 받는 여성이 드문 시절 몽고메리는 사범 대학까지 갔다. 앤이 친구들과 소설 클럽을 결성하거나 교사가 돼 결혼을 하고, 자녀를 여럿 두는 것은 몽고메리와 꼭 닮은꼴이다.

 

<빨강 머리 앤> 이후 출간된 후속작은 9편이 이르고, 이 작품들은 앤의 노년과 후손의 이야기까지를 다룬다. 몽고메리는 이 시리즈를 집필하며 신예 작가에서 중년의 소설가 됐으니 <빨강 머리 앤> 시리즈는 과히 작가의 삶을 담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당시 여성들에 대한 인습을 거부하고 많은 곳을 여행하며 인생을 즐긴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빨강 머리의 작은 소녀 하나를 탄생시켰지만 그 소녀는 수많은 여성 작가를 키웠으니 <빨강 머리 앤>이 여성의 삶에 기여한 바를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빨강 머리 앤>을 읽지 않고 성인이 된 여성은 드물 것 같다. 현재 20, 30대가 된 성인 여성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 <빨강 머리 앤>을 읽고, 만화영화로 방영된 동명의 작품을 보며 앤과 다이애나와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 속에 들어가 또래 친구로 함께 성장했을 이들에게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는 일은 오래전의 나와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더불어 완역으로 읽는 <빨강 머리 앤>에는 어린 시절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앤의 또 다른 모습이 담겨 있다.

 

자신을 놀린 남자아이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리칠 만큼 씩씩한 앤은 상처가 많은 아이이기도 했다. 앤은 고아였고, 자신 역시 어린이인데도 아기 돌보는 일을 하며 남의 집을 전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커스버트 남매에게 입양되지만, 매슈와 마릴라가 원했던 것은 농장 일을 도울 수 있는 남자아이였지 앤이 아니었다.

 

그러나 앤은 특유의 명랑함으로 세계를 긍정한다. 어릴 적에는 앤이 이렇듯 굳건한 내면을 지닌 아이인 것을 미처 몰랐다. 앤이 어떻게 자신의 결핍과 당당히 맞서는지, 얼마나 로맨틱한 아이인지를 알 수 있다.

 

“저는 이 길을 즐기기로 마음먹었어요. 제 경험에 따르면, 마음만 굳게 먹으면 어떤 일도 즐길 수 있어요.” 매슈와 마릴라와 영영 이별할지 모르는 순간에 앤이 하는 말이다.

 

꿈결 같던 입양이 취소될지 모르는 순간에도 이렇듯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기쁘게 바라보는 소녀는 대체 얼마나 굳은 내면을 지닌 것일까. 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세계에서 좋은 것을 찾아내는 힘이 있다.

 

그러한 힘으로 앤은 기꺼이 자신을 가족으로 맞아준 매슈와 마릴라, 첫 번째 친구가 돼준 다이애나, 그리고 자신의 집인 그린게이블스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런 앤의 사랑이,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한다는 점이다.

 

앤의 사랑은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냉정했던 마릴라는 앤을 양육하며 내면의 사랑을 깨닫고, 무감하게 하루하루를 반복하던 매슈는 앤 덕분에 일상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 다애이나는 앤과 친구가 돼 우정을 나누는 기쁨을 배우고, 앤을 못생기고 말 많은 아이라고 생각했던 린드 부인은 자신의 오만함을 되돌아본다.

 

1908년 처음 발표된 이래 무려 100년 동안 사랑받은 <빨강 머리 앤>은 이번에 윌북출판사가 네 편의 고전을 묶은 <걸 클래식 컬렉션>을 통해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애나 본드가 고전의 품격에 걸맞은 감성적이고도 고풍스런 표지를 디자인했고, 젊은 여성 번역가 고정아가 계집아이를 여자아이로 번역하는 등 차별적 표현을 지양하는 언어로 고전에 현대적 숨결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