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스트리밍 '읽는 시대' 가고 '보는 시대'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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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스트리밍 '읽는 시대' 가고 '보는 시대' 왔네

TV밖 뛰쳐나온 ‘웰메이드 다큐물’ 중장년층서 인기몰이
대담한 주제, 세련된 영상…재미와 지적 욕구 동시 충족

[지데일리] “디자인 천재의 미학 세계, 경이로운 대자연, 저개발국의 화장실 문제, 알래스카로 간 정착민들, 미등록 이민자들의 애환, 길 위의 요리사들, 한계 뛰어넘은 스포츠인들, 홍콩의 우산 혁명, 우주탐사 기술 등 다양한 스트리밍 다큐 덕분에 요즘 세상사를 보는 창(窓)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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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스트리밍 서비스 별 독점 다큐멘터리

 


친구들 사이에서 다독가(多讀家)가로 유명한 50대 L씨는 요즘 ‘다큐멘터리 읽기’에 한창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에 진출한 중국 공장을 주제로 제작해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팩토리'를 주변에 적극 추천하고 SNS에 감상평까지 남길 정도다. 


대기업 직원 40대 Y씨도 입소문이 난 스트리밍 다큐멘터리는 가능한 꼭 챙겨보는 편이다. 소득 불평등, 기후변화, 세계경제, 자본주의 폐해 등 굵직한 글로벌 시사 이슈들을 균형감 있게 다룬 작품들이 많은데다 세련된 영상미나 실험적인 포맷 덕분에 엔터테인먼트 측면에서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다. 최근에는 ‘암호화폐'처럼 새로운 주제를 접하면 관련 다큐멘터리가 있는지부터 검색한다. 요즘 1020세대들이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먼저 검색하는 모습과 자못 흡사하다. 


과거 지상파가 주도했던 다큐멘터리 장르가 스트리밍 주도로 넘어가면서 성인들을 위한 ‘디지털 서가(書架)’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스트리밍 다큐멘터리는 바쁜 4050 세대 직장인들 입장에서는 온라인에서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시청할 수 있는데다 넷플릭스, 아마존프라임처럼‘창작의 자유’와 ‘대규모 투자'를 보장하는 스트리밍 사업자들이 최근 늘어난 덕분에 전반적인 질 향상은 물론 다양성 확장 측면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역사, 자연, 과학, 정치, 건축, 시사, 음식, 경제, 범죄수사 등 그야말로 전방위 분야를 다루면서 기존 다큐멘터리물들이 주로 다루던 소재들의 한계도 뛰어넘고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 가입자가 급증하면서 분야별 각 전문가의 다큐멘터리 감상평이나 추천 목록도 인기를 끌고 있다. 특정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는 다큐멘터리 특징 덕분에 오랜 기간 전문성을 쌓아온 전문가나 인플루언서 또는 일명 ‘덕후’들의 추천과 검증을 받은 다큐멘터리는 입소문을 타고 오랫동안 주목받는 일명 ‘롱테일'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온라인 블로그에서는 최근의 홍콩 시위 상황이나 건축, 음식처럼 특정 이슈별로 관련 스트리밍 다큐 여러 편을 묶어서 추천하는 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넷플릭스 등이 주도하는 ‘스트리밍 다큐멘터리 붐’의 성공 요인으로는 대규모 투자, 창작의 자유 보장, 빠른 호흡과 지루하지 않은 영상 편집, 방송 편성・형식・길이 등 기존 제약에서 자유로운 온라인 유통 형태 등이 꼽힌다. 


넷플릭스의 경우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들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 지형까지 바꿔놓고 있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임종수 교수는 지난 5월 개최된 국내 최대 영상콘텐츠 거래시장인 ‘BCM2019’의 다큐멘터리 세션 세미나에서 넷플릭스는 다큐 장르에서 새로운 소재와 포맷에 계속 도전하고 제작 과정에서 소홀하기 쉬운 품질 관리와 혁신성을 꾸준히 추구해왔다고 평가했다. ‘길 위의 셰프들'의 데이비드 겔브(David Gelb) 감독은 “새로운 다큐를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넷플릭스가 사실상 유일했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 못지 않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들이 성공하면서 최근에는 다큐멘터리 시장의 또 다른 큰 손인 방송사들도 제작자들에게 ‘넷플릭스 다큐처럼 보이게 만들 것(look Netflixy)’을 요구하거나 제목, 포맷도 넷플릭스처럼 영화같은 제목을 달거나 여러 편의 시리즈물을 요청하는 사례들도 늘고 있다.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는 스트리밍 서비스발 ‘다큐 르네상스’ 덕분에 소규모 독립 제작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창출되고, 기존 다큐멘터리 문법의 파괴 등 혁신적인 포맷을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는 평가다. 테드 사란도스 넷플릭스 최고콘텐츠책임자(Chief Conent Officer)는 “평생 다큐멘터리라고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넷플릭스에서 새로운 형태의 다큐를 시청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한 두 차례 방영되는 영화관용 또는 지상파 다큐와 달리 스트리밍 서비스는 이용자가 원할 경우 언제든 찾아볼 수 있는 점도 장점이다. 최근 다큐멘터리 시장에서는 인터넷에서 넘쳐나는 가짜뉴스나 과잉정보에 피로감을 느끼는 20~30대의 젊은 스트리밍 서비스 가입자들이 예전보다 더 자주 프리미엄 다큐물을 찾는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미국의 독립프로덕션 옥토버 필름의 매트 로빈슨(Matt Robinson) 감독은 지난 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3~4년간 넷플릭스 다큐 덕분에 사람들이 까다로운 주제나 자막을 봐야 하는 다큐물도 오랫동안 집중해서 시청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다큐멘터리도 픽션(fiction)물만큼 상당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역으로 다큐에서 사용된 새로운 포맷들이 드라마에 차용되기도 하는데 넷플릭스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다큐보다 더욱 실감나는 묵직한 사회고발 드라마로 탄생했다. 


하지만 정작 스트리밍 서비스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장점은 케이블TV나 지상파와 달리 ‘광고주 입김'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구독형 사업 모델 덕분에 광고주를 크게 신경쓸 이유가 없고 이 덕분에 더 많은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제작 환경을 보장할 수 있다. 과거와 비교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민감하거나 대담한 주제를 다루는 새로운 다큐멘터리들이 꾸준히 출시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 여길 수 있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는 이미 주요 영화제에서도 꾸준히 명성을 쌓아왔다. 2017년 내전 중 폭격에서 부상당한 민간인을 구하는 자원봉사 단체를 그린 ‘화이트 헬멧: 시리아 민방위대’가  89회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18년 ‘이카로스'가 장편 다큐상을, 2019년 ‘피리어드: 더 패드 프로젝트'가 단편 다큐상을 수상하는 등 3년 연속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이보다 앞선 2014년에도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공개한 ‘더 스퀘어’가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후보작에 오른 바 있고, 2015년에는 아프리카 국립공원을 지키는 관리원들을 취재한 ‘비룽가(Virunga)’가, 2016년에는 ‘니나 시몬: 영혼의 노래’과 ‘윈터 온 파이어: 우크라이나의 자유 투쟁'가 아카데미 다큐 부문 후보작에 올랐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발 다큐 붐은 애플, 디즈니 등 스트리밍 서비스 후발 주자들의 움직임에서도 감지된다. 최근 애플TV+를 통해 콘텐츠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한 애플은 올초 다큐멘터리 전문가를 영입하고 서비스 출시 직후 2편의 독점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계획이다. 액션, 코미디 분야외에도 교육적인 프로그램에도 큰 비중을 둘 계획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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