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당신이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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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당신이 누구인지

[GSEEK in BOOK] 소비 수업
윤태영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행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단순히 패션과 관계된

트렌드나 시류 정도로만 이해해선 곤란하다는 얘기다.

유행은 낡은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소비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유지함은 물론 소비를 습관화한다.

그리고 이미 포화 상태에 도달해 있는 소비시장을 해제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최신의 새로운 제품으로 대체한다.

유행은 그렇게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소비하고 또 소비하게 만든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행은 소비를

무한히 반복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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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유행에 민감하다. ‘힙’한 것을 쫓아 연남동으로, 망리단길로, 익선동으로 몰려가거나, 새로운 브랜드가 등장하면 누구보다 발 빠르게 소비하고 경험담을 경쟁하듯 SNS에 올린다. 

 

현대인에게 유행에 뒤처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유행에 뒤처진다는 것은 삶의 양식과 존재 방식이 더 이상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에 머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대학엣 '현대 소비사회의 이해' 강의를 맡아온 윤태영 교수의 <소비 수업: 우리는 왜 소비하고, 어떻게 소비하며, 무엇을 소비하는가?>는 소비라는 프리즘을 통해 현대 사회의 열한 가지 풍광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가장 먼저 유행을 다루며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행의 역할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고 말한다. 유행은 낡은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소비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유지함은 물론 소비를 습관화한다. 아울러 이미 포화 상태에 도달한 소비시장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낸다. 

 

연남동이나 익선동과 같은 ‘핫플레이스’로 대표되는 공간의 유행 역시 오래된 도시 구역을 해체하고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유행은 지난해 구입한 제품을 낡고 트렌드에 뒤처진 것으로 만든다. 이를 통해 그 자리를 최신의 새로운 제품으로 대체한다. 

 

매년 새롭게 출시되는 최신 스마트폰을 구입하느라 아직 충분히 사용이 가능한 스마트폰을 처분하고 백만 원이 넘는 돈을 쓴다. 이처럼 유행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듭하며 현대인으로 하여금 소비하고 또 소비하게 만든다. 저자는 유행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수많은 원동력 중 하나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소비는 단순히 사물이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기호를 소비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형식적으로 계급이 없어진 현대사회에서 소비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계급적 차이와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분석을 끌어온다. 

 

부르디외는 특별한 취향과 소비에 대한 선호, 나아가 삶의 방식을 계급의 영향력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했다. 그는 계급 스스로가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특정의 생활양식을 채택하고 이를 통해 다른 계급과의 구별짓기를 끊임없이 시도한다고 분석했다.


취향, 특히 문화 취향의 차이는 주로 개인의 타고난 본성으로 설명되면서, 취향의 차이가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부르디외의 연구 결과가 나오자 가장 개인적인 것이라 여겨졌던 취향에도 계급적, 문화적 차이가 은폐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구별짓기’는 현대사회의 소비 형태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지점을 제공한다. 저자는 소비를 구별짓기를 위한 현대인의 욕망이 분출되는 통로로 해석한다. 자기 과시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는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 역시, 소비를 통해 타인과 자신을 구별짓기 위한 욕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소비에 대한 연구나 관심은 제한적이었다고 말한다. 초기 자본주의의 사상적 바탕을 제공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은 신으로부터 부여받는 의무, 즉 하늘에서 부여받은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정신이 자본주의 발전의 밑바탕이 됐다고 봤다. 금욕을 강조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소비’는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소비를 천박한 물질주의나 무분별한 쾌락과 동일시했다. 

 

이와 달리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소비의 중요성은 점차 커진다. 장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19세기 일반 대중이 노동자가 됨으로써 근대인이 됐듯이 20세기 이후 대중은 소비자가 됨으로써 현대인이 됐다. 

 

저자는 소비가 점차 중요하게 부각되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봉 마르셰 백화점 성공 과정 등 역사적인 측면도 살펴보고, 점차 커지는 소비의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좀바르트, 짐멜, 벤야민, 보드리야르와 부르디외 등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중요하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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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소위 '뜨는 거리'를 배회하는

도시인들은 절대 숨가쁜 속도로 걷지 않는다.

19세기 도시산책자가 파사주, 백화점 등 상품으로

가득 찬 공간을 느릿느릿 유영했던 것처럼

현대의 도시산책자들은 자본주의적 속도에 맞춰진

현대적 삶의 리듬에 저항하며 어슬링어슬령 골목길을 유랑한다.

이들이 유영하는 공간은 이내 핫플레이스가 되고,

핫플레이스가 되고자 하는 거리는 21세기 도시산책자를

유혹할 수 있어야 한다."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식사하고, 영화를 보거나, 전시회를 가는 모든 행위는 소비로 시작해 소비로 귀결된다. 현대인에게 소비는 단순히 ‘재화’를 소비하는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방탄소년단(BTS)의 음악이나 클래식과 같은 문화를 소비하거나, 다양한 종류의 와인이나 커피를 감별할 수 있는 취향을 소비하거나, 홍대나 연남동, 경리단길과 같은 공간을 소비하기도 한다. 

 

한때 ‘절약’이 미덕이었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제는 ‘플렉스 소비’처럼 고가의 상품에 돈을 쓰면서 자랑하는 소비 방식도 생겼다. 현대인은 어떤 물건, 어떤 공간, 어떤 문화를 소비하느냐에 따라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바야흐로 소비가 모든 것이 된 시대다.


유행은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왜 현대인은 새롭게 등장하는 핫플레이스에 열광하며 공간소비에 몰입하는지, 현대사회에서 교양과 매너는 어떻게 구별짓기를 위한 기제가 됐는지, 현대인들이 몸 가꾸기의 고단함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저자는 소비를 통해 현대인의 욕망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한다. 유행, 공간, 장소, 문화, 광고, 육체, 사치, 젠더, 패션, 취향 등 저자가 선별한 열한 가지 키워드는 현대인의 일상은 물론 가장 은밀한 곳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소비의 의미를 찾는다. 


저자는 최근 구별짓기를 위한 소비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소비 대상의 변화와 소유하지 않는 소비다. 물질적 소유보다는 공유와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비가 확산되고 있다. 

 

핫플레이스가 아닌 특색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공간소비, 재미와 의미를 공유하는 경험소비, 과시보다는 내면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문화소비 등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저자는 이처럼 공유와 경험이 소비의 최대 화두로 자리를 잡은 지금, 과시적이고 중독적인 소비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하고 깨어 있는 소비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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