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허기질 때, 당신을 위한 '밥 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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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저작

일상이 허기질 때, 당신을 위한 '밥 처방'

[질문하는 책] 밥상의 말
목수정 지음, 책밥상 펴냄

"외할머니의 밥상은 풍요의 식탁이었다. 단칸방에 사셨던 할머니

 의 부엌에선 언제나 들판에서 온 상냥한 풍요가 상을 채웠다. 들에

서 캐와 말린 나물들 4~5가지가 들기름 향을 풍기며 옹기종기 놓였

고, 도토리를 따서 집에서 쑨 묵, 소쿠리 하나 가득 만들어서 손으로

집어먹던 쑥버무리, 깨강정, 식혜....... 할머니는 음식으로 축제를 만

드는 사람이었다. 자연이 주는 것들로 손끝에서 풍요를 지으며 살아

가는 할머니는 삶의 기쁨을 만들어주는 선물 같은 존재였고, 할머니

를 통해 매일 선물 받는 복된 시간을 누렸다.

엄마가 되고, 세 사람을 위해 매일 밥 짓는 사람이 되었다. 먼 나라에

와서 엄마 노릇을 시작한 나의 음식들은 매번 흔들리는 맛이었다.

감자가 설익기도 하고, 국이 짜기도 했으며, 치즈 케이크는 허물어져

내리곤 했다. 엄마가 되면 당연히 엄마가 해주던 그런 음식들이 손

에서 나오는, 그런 마술은 없었다. 그러나 요리에 소질이 없다고 물

러설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요리란, 노동의 시기적 한정성이 없다

는 면에서 출산, 육아와는 또 다른 차원의 가사노동이었다. 내 할머

니와 어머니가 그리한 것처럼 혼신을 다해 여든이 넘도록 그 노동을

하겠노라 선택한 적 없으나, 살아 있는 한 벗어날 수 없는 노동이었

다. 결국 밥하기는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하는 한 도망칠 수 없는 노동

이라는 자각에서 고민과파 같등은 시작되었다. 이 책의 절반은 부엌이

란 공간에서의 노동을 이떻게 받아들이고 자리매김할 것인가, 평등

의 가지를 훼손히지 않고, 자연을 크게 거스트지 않으며 이 작은 공

장을 어떻게 가동할까에 대한 부단한 몸부림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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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를 다듬고 음식을 만들어 그저 맛있게 먹는 텔레비전 속 화면을 보며 열광하고, 혼자 먹거나 대충 배를 채우던 낯선 이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소셜 다이닝 모임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시대다. 

 

사실 세 끼를 ‘제대로’ 챙겨 먹는 건 어려운 일이 된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한 끼라도 밥다운 밥을 먹고 싶어 한다. 몇 년 전부터 그럴듯한 정찬이 아닌 ‘집밥’이 외식의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집밥을 차릴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밥’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밥상의 말>(책밥상)은 먹는다는 것의 소중함과 일상 속에 숨어있는 '밥'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는 '밥'을 통해 먹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음식을 먹기 위한 평범하고 사소한 찰나들이 모여 진짜 ‘맛’을 만듦을 알려준다. 직접 요리하고 함께 나누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음식을 나누는 순간이 우리를 위로하며 치유해주는 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밥을 한다'는 것은 먹고 살아야 하는 한 도망칠 수 없는 평생의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삼시 세 끼 제 손으로 밥을 짓는 자로서 저자 목수정은 한국과 파리라는 두 문화에 부대끼며 경험하고 관찰한 ‘밥상’ 이라는 세계 속에 들어앉은 삶의 작동을 끄집어낸다. 생명 유지의 온기라는 1차적 당위성을 기본으로 그 위에 켜켜이 쌓인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 체제적, 젠더적 메커니즘까지 들춰낸다.

 

밥상 위의 한 끼는 먹는 위의 안위를 바라는 기도이자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노동의 결과물이다. 아울러 인간의 한 끼를 위해 다른 생명의 희생은 전제되며 가속화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그 희생은 전 인류적 재앙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밥상은 저자에게 삶에 지칠 때면 온기를 전하는 사랑의 기억을 끄집어내게 하고, 밥 짓는 자로서 부엌이라는 현재의 공간에서 노동에 대한 평등의 가치를 부단하게 실현하게 한다. 더불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식단을 구상해 부모의 유전자를 이어갈 아이와 함께 지구라는 푸른 별에서, 생명이 있는 것들과 계속해서 조화롭게 살아갈 대안과 미래를 그리는 시작점이다.


이 책은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만 하는, 밥이라는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매일의 의식 안에 담긴 노동의 의미와 생명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밥 세 끼로 키워져왔던 날들에서 밥을 짓는 자로 변신하며 맞닥뜨린 밥상 위, 삶의 작동에 대해 품어온 오롯한 생각들을 단백하게 전한다.


"할머니의 식탁엔 일년 내내 정성껏 말려온 온갖 나물들이 꼬

들꼬들 들기름 냄새를 풍기며 올라왔고, 자글자글 부쳐진 오색의

전들이 나란히 놓였다. 그리고 아무도 홍내 낼 수 없는 황홀한 할

머니 표 미역국, 잡채, 묵, 식혜....... 사람 많은 대중 목욕탕에서

옆 사람 어깨에 부딪혀가며 때 밀듯 쪼그려 앉아 할머니의 명절

상에 놓인 진수성찬을 먹으며 모두가 행복해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좁은 방에 끼어 앉을 수 있나 헤아리며

우린 늘 신기록 경신을 하곤 했다. 다 먹고 나갈 때까지 누군가는

서 있고, 누군가는 다리를 오므리고 문간에 앉아 있다가 자리가

나면 밥상으로 진출하곤 하는 그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고, 개선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좁아터진 방에 끼어 할머니의 전설적인 나물과 전을 먹으며

새해를 맞는 건, 우리에게 일종의 반복되는 의식이었다. 그 복닥거

리는 식사가 끝난 후에야 조금 더 넓은 우리 집에 가서 사촌들과

옻놀이 하며 놀았고 이모들은 할머니와 함께 부엌에 앉아 수다를

멀며 전을 담았다."

 

저자는 우선 밥상 위 음식이 가져다주는 추억, ‘온기의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오로지 "밥은 먹었니?"라는 질문 하나로 딸의 안위를 챙겼던 엄마의 밥상과 정성스런 다과상으로 가슴 아픈 병을 단박에 낫게 하는 고모의 찻상, 단칸방에서 어깨를 부딪혀가며 새해를 맞던 할머니의 설날 상은 팍팍한 삶을 견디게 하는 사랑과 치유의 다름 아닌 이름이었다. 

 

타향에서 살며, 프랑스 남자와의 삶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도 그가 제 나라의 크레프만큼이나 ’김치부침개‘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손으로 ’히잡‘이라는 마초적 관습을 과감히 벗어던진 모로코 여성의 강인함을 이해하게 된 계기도 ’노란 풍요‘의 이미지를 선사한 ’꾸스꾸스‘였다. 

 

낯선 땅 걸음마를 배우는 심정의 절박한 유학생 초기, 다시 공부할 힘을 불어넣어 준 것도 따스한 ’뱅 쇼‘ 한 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온기‘를 전하는 음식은 ’힘이 세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밥상이 온기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노동’으로 차려야 한다.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여자가 남자보다 더 오래 살고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제 몸을 움직여 밥하기를 행하며 ‘살림’이라는 1차적 노동이 주는 삶의 구체성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낮고 넓은 수평적 연대에 익숙한 여성은 일상의 자잘한 의무와 관계 속에서 기쁨과 슬픔을 요리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다만 축적된 희생은 원망을 낳고, 강요된 희생은 자기파괴를 낳는다. 이에 저자는 하루도 가사노동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 가정이라는 공장에서 여자와 남자는 머리를 맞대고 함께 제 역할을 찾고, 나눠 꾸려가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는 남자의 가사노동 참여뿐 아니라, 여자도 제몫의 경제적 책임을 지면서 적절한 '협박의 언어'를 사용해 가며 ‘사랑의 마법’에서 벗어나, ‘경단녀’는 있지만 왜 ‘경단남’은 없는지를 물으면서 이성과 현실에 발을 디디며, 협업의 일상을 꾸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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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는 소를 먹지 않고, 불교의 승려들은 육식을 금하며, 유

대교화 이슬람교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육식

에 대한 급기를 가진 인류는 제법 많다. 이슬람과 힌두교 신자만

합해도 20억이 넘으니 나머지를 합하자면 인류의 1/3 정도에 이

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아무런 육식에 대한 금기 없이 살아있

을 경우 소비되었을 육류의 양을 생각해보면 새상 종교의 숨겨진

순기능을 발견했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금지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절제된 욕망의 영역이 늘어난 것

을 의미하기도 한다. 종교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찾아 인간의 욕망

을 억제하도록 시킨 것이기도 했다.

딸아이는 여덟 살 부렵, 채식을 2년 정도 시도했다. 공장식 축

산이 이뤄지는 아비규환의 장면을 5초 정도 유튜브에서 본 걸로

충분했다. 아이는 자신이 하는 욕식이 동물들에게 이떤 희생을 요

구하는 일인지를 간파했고 그 순간 채식으로 돌아섰다. 2년 뒤, 슬

그머니 채식주의를 놓고 다시 소극적인 잡식으로 돌아섰지만 고

기를 즐기진 않았다."

 

저자는 식습관 속에 담긴 문명과 생태, 사회적 문제 등을 짚으며 궁극적으로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밥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치킨 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닭들의 생활은 정녕 안녕한지, 아침 식사로 시리얼을 섭취하는 건 어떻게 장애와 일베를 키워내는 일이 되는지, 왜 일찍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채식주의자여만 했는지를 통해 지금의 ‘밥상’에 대해 다시 들여다볼 것을 요구한다. 

 

이에 더해 귀족의 도구였던 포크를 대중들의 일반 식사 도구로 쟁취시키고, 이윤을 추구하려는 유기농 매장을 더 많은 종의 식물과 동물이 공존하는 터전으로 바꾸어 놓은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힘’도 간과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식구로서, 친구로서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지금, 새로 생겨난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마비되는 상황에서 여와 남이 동물과 사람이, 수많은 종의 식물들이 함께 잘 사는 일은 바로 삶의 모드를 바꿔줄 ‘밥상’에서부터 시작함을 거듭 환기시킨다.


저자는 생명을 키우는 음식이 올라오는 밥상이, 여와 남을 평화롭게 존재하게 하고 모든 생명을 살리며 나아가 온 지구를 살리는 모두를 위한 ‘착한 밥상’으로 변모하기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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