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에서 거래로 만들어진 미술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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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에서 거래로 만들어진 미술시장

[GSEEK in BOOK] 미술시장의 탄생
손영옥 지음, 푸른역사 펴냄

[지데일리] ‘시장’은 ‘여러 가지 상품을 사고파는 일정한 장소’이기도 한데 ‘상품으로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가 이뤄지는 추상적인 영역’을 말하기도 한다. 미술시장은 미술품이라는 구체적인 재화, 미술품 제작이라는 구체적인 서비스의 거래가 이뤄지는 영역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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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미술시장이 출현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손영옥의 <미술시장의 탄생>에 따르면 한국 미술시장이 전근대적 성격을 벗어나 근대적인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으로 이행한 시점은 개항기로 볼 수 있다. 

 

한국 근대 미술시장 형성사의 첫머리를 개항기에서 시작한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고미술품으로 인정받는 ‘미술로서의 고려청자의 발견’이 이뤄진 것도 개항기이고, 갤러리의 전신인 ‘지전’과 ‘서화관’ 등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개항기다.

 

개항기는 고종이 직접 통치를 한 지 수년 뒤인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수호조약을 맺은 것을 기화로 구미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며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해가던 시기다.

 

대외 개방은 미술시장에도 영향을 줬다. 서양인들이 외교, 선교, 사업 등 여러 목적으로 들어왔고, 이들은 미술시장에 새로운 수요자로 나섰다. 수요는 공급을 창출한다. 화가들은 서양인의 취향과 목적에 맞춰 ‘수출화’라는 풍속화를 개발해 만들어 판매했다. 중개상들은 서양인들의 동양 도자기 애호 취미를 눈치 채고 무덤에서 꺼내진 옛 도자기와 토기들을 몰래 거래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서양인들은 민속품을 수집해 고국의 민족학박물관에 제공했다.


청나라와 교역이 늘어나면서 상하이를 중심으로 번성한 해상화파의 감각적이고 실용적인 화풍이 한국으로 건너와 유행했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에 따라 신식학교가 생겨나고 철도가 부설되고 전차가 놓이고 신분제가 폐지된 새로운 시대, 이렇게 달라진 세상에서 청나라의 감각적이고 세련된 화풍은 인기를 얻었다.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싼 열강의 다툼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개항기도 막을 내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을사늑약(1905)을 맺어 한국의 외교권을 뺏은 일본은 서양인들에게 출국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개항기는 30년이 채 안 된다. 그 시공간을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활보했던 서양인들은 공과를 떠나 한국 미술시장에 역동성을 부여했다는 평가다.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싼 열강 간 치열한 다툼의 최후 승자는 일본이었으며, 그 변곡점은 러일전쟁의 승리였다. 일본은 1904년에 시작한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905년 7월 미국과 밀약을 맺고, 8월에는 영일동맹을 수정해 한국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해 11월에는 고종황제의 허가 없이 체결에 동조하는 5명의 대신과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강탈했고 간접통치기구인 통감부를 통해 한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러일전쟁 승리 후 서울은 완전히 일본의 세상이 됐다. 자국에서 기회를 잡지 못한 일본인들이 물밀듯이 조선으로 이동했다. 일본의 무법천지가 된 세상에서 일본인 상인들은 움직임은 재빨랐다. 개성에서 도굴된 고려자기를 거래하기 위해 경매와 골동상점이 서울(경성)에서 차례로 문을 연 시점이 1906년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시사적이라고 하겠다. 공식적인 식민지 전락은 1910년 경술국치이지만 이처럼 미술시장에서 체감된 일본의 지배는 5년 앞섰다.

 

일제의 제국주의 기획에 따라 개관한 이왕가박물관(1908)과 조선총독부박물관(1915)의 수집 행위는 일본인 골동상들이 발빠르게 미술시장을 장악하는 발판이 됐다. 일본인 골동상들은 ‘골동 신상품’인 고려자기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애호되던 조선시대 고서화 분야까지 진출했다. 

 

나라가 망하자 양반가에서 흘러나온 고서화는 그렇게 일본인 중개상을 거쳐 일본인 상류층 호사가의 손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식민지 조선의 권력과 부를 거머쥔 일본인들은 미술시장의 핵심 수요자로 부상했다. 바야흐로 일본인들이 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일제의 한반도 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는 분수령이 됐다. 문화통치의 산물로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최해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는 1920년대를 가히 ‘전람회의 시대’로 특징짓는 기폭제가 됐다. 

 

앞서 민간에서도 최대 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주최한 서화협회전람회가 1921년부터 시작했는데, 여기에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가 가세하면서 전람회는 보편적인 미술 관람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신진작가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는 관전이 갖는 권위로 인해 이른바 ‘선전鮮展 스타일’을 낳으며 일제가 피지배 민족을 순응시키는 통치 기제로 활용됐다. 개인전도 활발하게 열렸는데, 일본 유학파 2세대에 의해 서양화 개인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통치가 10년을 넘김에 따라 미술 수요층에서도 슬슬 손바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초기 고려자기 수집가층이 사망하거나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물러나자 신규 수장가층이 시장에 들어왔다. 이에 고미술시장의 파이가 커졌고 이를 겨냥해 골동상들이 연합해 만든 경성미술구락부가 생겼다. 

 

경성미술구락부는 주식회사 형태를 취하고 주기적으로 경매를 하면서 경매 도록과 진위 감정서까지 발행하는 근대적 시스템을 갖췄다. 운영 초기 조선백자는 수요가 형성돼 있지 않아 가격이 매우 저렴했다. 조선백자의 미적 가치를 ‘발견’한 주역은 야나기 무네요시와 아사카와 노리타카, 아사카와 다쿠미 등 일본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조선백자에 미술의 아우라를 입힘으로써 1930년대 조선백자 붐을 여는 단초를 제공했다.


1930년대는 자본주의가 관통한 시대였다. 식민지 조선의 부가 집결된 경성은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스카이라인 뿐만 아니라 도시 속을 활보하는 사람들의 심리에서도 자본주의의 영향은 확연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백화점의 증축과 확장은 이런 거대 자본의 한국 진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서울에는 미쓰코시, 미나카이, 조지아, 화신 등 서양 건축의 외관을 한 여러 백화점이 도시의 풍경을 바꿨다. 백화점은 엘리베이터와 옥상정원 등 첨단 시설을 갖춰두고 상류층 고객을 겨냥해 갤러리도 만들었다. 백화점 갤러리는 전시 전용 공간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전시는 상설화되고 기획전까지 열렸다. 지금의 서울 삼청동에 있는 갤러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본격 상업 화랑이 출현했다.


이 시기 미술 수요자들에게서 주목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금광 개발, 주식거래 시대의 개막과 함께 미술품 역시 적절한 시점에 팔아 차익을 실현할 수 있는 투자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 전근대 시대에는 없던 이런 투자심리가 기저에 흐르며 경성미술구락부 등 미술시장은 번창했다.

 

한국인 수장가와 한국인 중개상이 미술시장의 전면에 등장한 것도 1930년대다. 한국인 수장가층이 부상하는 과정에는 고려자기와 조선백자, 서화 등이 지켜야 할 민족정신의 기호로 상징화돼 수집이 장려된 시대적 분위기도 작용했지만, 근저에는 경제적 욕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1937년부터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시경제체제로 들어갔은 미술시장은 해방 이전까지 상승세를 이어갔다. 미술은 상류층의 문화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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