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일본에서 기자로 산다는 것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베의 일본에서 기자로 산다는 것

[질문하는 책] 신문기자
모치즈키 이소코 지음, 임경택 옮김, 동아시아 펴냄

'내가 또다시 손을 든 순간, 사무관이 주의를 주었다. 

“같은 취지의 질문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잠깐 한숨 돌린 후 목소리 톤을 의식적으로 높여서 맞받아쳤다.

“어떤 질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같은 취지의 질문을 더는 반복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스가 관방장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 못하는 이상, 나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

또다시 돌아온 무성의한 답변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내 생각을 전했다.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도쿄신문입니다. 

누군가의 고발로 출처가 분명해져도 지금처럼 같은 답변을 하실 겁니까? 

정부 입장에서 진지하게 조사할 것인지의 여부는 답변하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답변할 수 없다는 답변이시네요.”'

 

8962623366_01.jpg
모치즈키 이소코 기자 ⓒ동아시아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2020년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일본은 66위다. G7 중 최하위다. 일본의 ‘기자클럽’ 제도는 오래전부터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보 접근권을 손에 쥔 정부가 일부 언론인들을 클럽에서 제외시키며 정보를 얻는 통로 자체를 차단하는 시스템이다. 


2013년 아베 정권이 통과를 강행한 ‘특정비밀보호법’에 따라 각료들이 ‘특정비밀’로 지정한 정보를 보도한 기자는 법적 처벌을 받게 됐다. 정부 권력이 정보를 통제하는 것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신문기자>는 권력의 통제와 위협을 무릅쓰고 진실을 찾기 위해 끝없이 질문하는 모치즈키 기자의 17년간의 취재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2004년 ‘자민당 정치자금 스캔들’을 집중 취재했다. 일본치과의사회의 정치단체인 일본치과의사연맹(일치련)이 자민당 요시다 전 의원에게 우회 헌금을 건넸다는 의혹을 포착한 후 단독 특종 기사를 쓴다. 


보도 이후 도쿄지검 특수부가 압수수색에 나섰고, 일치련 전 회장을 비롯한 간부 16명이 최종 기소됐다. 매스컴의 대응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특수부의 반응을 보고 더 큰 의혹이 있다는 것을 예감한 저자는, 집요한 취재 끝에 우회 헌금을 받은 ‘자민당 의원 실명 리스트’를 단독 입수한다. 


이 리스트를 기반으로 신문사의 보도 경쟁이 시작됐고,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까지 부정 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사건이 확대됐다.


극비 리스트의 출처를 알아내고자 했던 특수부는 저자를 포함한 <도쿄신문>을 상대로 강압적인 조사를 강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쿄신문>은 허위기사를 쓴다’, ‘모치즈키 기자는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라는 오명을 쓰지만, 발로 뛰는 취재를 멈추지 않는다.


2014년 4월 아베 정권은 무기 수출입과 무기의 국제공동개발을 금지하는 ‘무기수출 3원칙’을 철폐한 후 ‘방위장비 이전 3원칙’을 수립해 패전 이후 사실상 금지됐던 무기 수출의 족쇄를 풀기 시작했다. 


무기 수출이 국제적 공헌을 할 수 있고 자국 안보에 기여한다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수출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게 방위장비 이전 3원칙의 핵심이다.


저자는 다시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아베 정권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끼고 해금된 무기 수출 문제를 탐사보도한다. ‘<도쿄신문> 모치즈키 기자의 취재에 응하지 말라’라는 정부의 고시문으로 인해 방위산업체와 관계자 측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고 문전박대하기 일쑤였지만, 이내 저자의 용기에 힘입어 취재에 응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스가 관방장관의 회견에 참석한 모치즈키 기자가 손들어 질문하고 있다. 2017년 6월 6일, 저자는 ‘가케 학원 스캔들’을 취재하며 처음으로 정례회견에 참석했다. 아베 총리의 지인이 이사장을 맡고 있던 가케 학원이 국가전략특구로 선정되어 수의학부를 신설하는 과정에 아베 총리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다. 저자는 이 사건과 관련한 질문을 거듭하며 가케 학원에 관한 재조사를 이끌어냈다.

 

'여전히 모리토모 및 가케 스캔들을 비롯한 정권과 관저에 대한 의혹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묻지 않으면 내가 물을 수밖에 없다. 사회파를 자처하는 것도 아니고, 자의식에 사로잡혀서도 아니다. 이상하다 싶으면 납득할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경찰과 권력자가 숨기려는 것을 세상에 알린다. 나는 이것이 기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모치즈키 기자는 일본을 감시 사회로 만든다는 비판을 받은 ‘공모죄’ 법안과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를 건설하려 하는 아베 정권의 움직임을 꾸준히 추적해왔다. 이 책은 가마가야시 시장의 뇌물수수 의혹, 모리토모·가케학원 사학 비리 스캔들 등 정치·경제·사회를 아우르는 다양한 의혹을 추적해온 저자의 취재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불편한 질문을 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지만, 편안한 질문은 잘못된 것을 바꿔낼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권력을 향해 질문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질문 역시 멈추지 않는다. 


[크기변환]8962623366_1.jpg

 

기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취재하면 조금 더 나아질까? 이 사안의 본질은 무엇일까?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라고 강조하는 저자는, 숨겨진 진실을 찾는 것을 넘어 세상에 없던 진실을 만들어간다.

 

저자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구니이 검사 사건 조작’ 특종을 꼽는다. 사이타마지검의 구니이 검사가 실적을 위해 잘못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조작했다는 충격적인 정보를 입수한 후 이를 단독 보도한다. 그런데 생각만큼 기사가 파급력을 갖지 못한다. 결국 구니이 검사는 불기소처분을 받고, 훗날 비슷한 사건에 휘말려 또다시 논란이 된다.


'사람과 사람의 연대가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준다. 그 외에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나 정치평론가, 방송관계자, 아나운서 등 많은 사람에게 격려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는 해보지 못한 생각인데, 의심하고 분노하면서 문제를 추적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더욱 힘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저자는 혼자 쓰는 단독 기사는 그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러 매체와 정보를 공유하고 그 정보를 토대로 다양한 의혹을 제기하는 ‘연대’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걸 몸소 배운다.


저자는 정부의 억압이 강해질 때일수록 매체간의 경계 없는 수평적 연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함께해야만 조각난 진실들을 모을 수 있고, 언론을 향한 정부의 압박도 극복해나갈 수 있다. 동료들과 연대하며 저자가 써내려가는 진실은 경쟁과 억압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저자의 취재 분투기는 지난해 동명의 영화로 각색되어 개봉되기도 했다. 한국의 배우 심은경이 모치즈키 이소코를 모델로 한 기자 ‘요시오카’ 역을 맡았다. 아베의 민낯을 드러내는 영화라는 찬사를 받으며 일본 아카데미에서 우수작품상, 우수 남우주연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3관왕을 수상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