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 죽음을 부른 '치명적 왕관' [끌리는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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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 죽음을 부른 '치명적 왕관' [끌리는 신간]

  • 한주연 82blue@hanmail.net
  • 등록 20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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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귀가 당나귀처럼 큰 왕이 살았는데..." 하고 시작되는 ‘당나귀 귀 설화'는 누구나 들어 보았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전해지는 이 설화 속에서 왕의 귀는 당나귀 귀이기도 하고 말의 귀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원한을 사서 길어지기도 하고 왕이 되자마자 길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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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왕의 비밀을 알게 되는 사람은 이발사이기도 하고 복두장이기도 하며, 이들은 땅에 판 구멍 속이나 우물, 대나무숲에 비밀을 털어놓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노인경, 문학동네)는 수많은 왕들의 죽음이 던지는 삶에 대한 질문에 관한 이야기다. 그림책 작가인 저자는 다양한 형태로 전해내려오는 이 설화를, 왕들이 자꾸만 죽던 옛날 어느 나라에서 444번째로 왕이 된 한 사람의 자리에서 새로이 써내려갔다.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444대 왕의 기쁨은 아쉽게도 하루를 채 가지 못했다. 왕궁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귀가 당나귀처럼 커져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급히 복두장을 불러 커다란 왕관을 주문하지만 무거운 왕관을 쓰고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꾸 아픈 몸을 이끌고 끙끙 앓던 444대 왕은 문득 이전 왕들의 일기를 떠올리고 기록들을 읽어내려간다.

 

누구보다 강인했던 1대 왕은 왕관이 너무 커서 고꾸라져 죽었고, 몸이 원체 허약했던 126대 왕은 왕관의 무게 때문에 허리가 휘어 죽었고, 활발했던 157대 왕은 왕관이 떨어지는 바람에 새끼발가락 뼈가 부러져 죽었다. 


늠름했던 212대 왕은 수치심 때문에, 눈물이 많았던 256대 왕은 슬픔에 빠져서, 학구적이었던 367대 왕은 당나귀 귀의 원인을 찾지 못해 기가 막혀 죽었다는 대목에 이르면 다음 왕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을지 궁금해진다. 

 

갑자기 맞닥뜨린 사건 앞에서 지난 왕들이 겪게 되는 모두 다른 고뇌와 사건들에 대해 읽어내려가다가, 444대 왕은 마침내 결심한다. 이 커다란 왕관을 벗어놓기로. 귀 때문에 죽을 수는 없다는 답에 도착한 것이다.

 

누구나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감추고만 싶은 그 모습을 긍정하고, 마침내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의 씨앗 역시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 준다.

 

저자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패턴을 주제로 구성한 그림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옛이야기의 특성을 시각적인 방식으로 다시 그려낸다. 경쾌한 주황 별색과 패턴의 단순함은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보다는 왕들의 가지각색 성격과 다음 장면을 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서사를 이끌어 가는 방식으로 저자가 선택한 재료는 다름 아닌 ‘패턴'. 반복과 변주, 생략과 과장의 적절한 운용이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리듬감으로 인해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루할 틈 없다. 후반부의 팝업 장치와, 펼침을 고려해 제작한 사철누드제본, 본문을 하드커버의 한쪽 면에만 부착한 독특한 장정은 책을 경험하는 독자의 디테일한 감각을 충만하게 만족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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