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씹는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끌리는 신간]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곱씹는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끌리는 신간]

  • 한주연 82blue@hanmail.net
  • 등록 2022.03.26
  • 댓글 0

“위대한 일들이 저기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 콩들과 깻잎과 동글동글 유난히 예쁜 땅콩들이 내 입으로도 들어올 겁니다. 저 노동과 환대와 우정을 먹고 제 몸이 차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초저녁 바람에 밭 위에도 구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한티재)는 김해자 시인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농촌에서 15년째 초보 농사꾼으로 살면서 같이 밭 매고 같이 밥 먹는 이웃들의 이야기와 세상과 시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시인이 언니라고도 부르고 마음속으로 엄마라고도 부르는 허리 굽은 할매들과의 사소하지만 특별한 일상의 이야기들은 생생하고 즐겁고 따뜻하다. 

 

문명에 대한 통찰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유와 연민이 담겨 있는 시인의 산문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가치와 의미를 곱씹게 만들며, 동시에 위로와 용기를 준다.


시인에게 위대한 일은 씨앗을 뿌리는 일이나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같은 사소한 일들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땅과 이웃들의 주름진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이라고 말했던 시인은 자연과 이웃들의 친절과 대가 없는 보살핌 덕분에 ‘생각’에 찌들곤 하는 자신의 영혼에 빈틈이 생기고, 그 빈자리에서 시가 발아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양승분 씨를 들여다보면 시인 같습니다. (…) 시인은 명사라기보단 형용사나 부사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시야말로 동사인지도 모릅니다. 시적인 삶, 혹은 시적인 태도로 나와 이웃과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시인 아닐까요. 그러니 양승분 씨야말로 진짜 시인입니다.”


새벽부터 가마솥에 콩을 삶아, 잠 깨길 기다려 현관문 두드리는 구부러진 손가락, 복지관에서 갖다주었다는 국수와 함께 두부 두 모 꼬옥 쥐어 주는 굽은 손에서 시인은 ‘시’를 발견한다. 


“저를 먹여 주고 가르치고 보살피며 희망을 주고, 나눔과 우정으로 여기까지 오게 한 내 이웃들과 친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제 밭을 무료 급식소로 사용하면서 임대료 없이 세 살며 날마다 노래 불러 주는 명랑한 참새들과 텃밭의 모든 작물과 풀들께도요.”


농촌 공동체의 환대와 우정 속에서 몸과 마음을 보살피며 살아온 시인의 산문에는 땅속에 묻힌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뼈만 앙상한 역사 속에서 숱한 사람들의 속담과 이야기와 수수께끼와 노래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


또한 시인은 환대와 우정 속에 더 많은 이들이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농촌 정경을 떠올린다. 보다 깊게 사랑하고 창조하며 공짜로 파견된 이 지구에 희망을 피워 내는 일에 몰두하자고 이야기한다.


흙에 젖줄을 대고 살아가는 존재들, 세상의 바닥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시인의 산문은 삶을 대하는 진정 어린 태도를 보여준다. 

 

시인은 말한다. “나도 잠시 이 지구상에서 동거하다 갈 겁니다. 기왕이면 동거하는 동안 서로 어루만지며 나누며 살다 가고 싶습니다. 그런 세상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거의 회복되지 않을 만큼 인간이 망가뜨린 지구 한 모퉁이에서 저는 잠시 쉬어 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크기변환]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