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처음 맞지 않은 해를 보냈다 [끌리는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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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셋, 처음 맞지 않은 해를 보냈다 [끌리는 신간]

  • 이은진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2.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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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물셋이 되어 여섯 살 이후로 처음 맞지 않은 해를 보냈다. 나는 무엇보다 나보다 어린 동생들을 살려내고 싶었다. 아빠가 나와 동생들의 목을 죄어올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다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육교 난간에 서지 않게 하려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당장 바뀌는 것이 없더라도 그날그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잊지 않고 꼭 하려고 노력했다. 실어증 걸린 것마냥 말을 잃어버렸는데 던져진 질문들을 천천히 고민하고 그것에 대답해가며 아주 천천히 내 언어를 찾아갔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의 근원에 다가설 수 있을까.’ 스물셋 되던 해 아빠의 폭력을 못 이겨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할 때까지 피해자가 품고 있던 질문이었다. 김가을의 논픽션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천년의상상)는 이 절박한 물음에서 시작됐지만 종국에는 묵직한 어젠다를 사회에 던진다. 

 

우리 모두가 알지만 어떻게 분류하고 명명해야 할지 몰랐던 폭력 범죄. 훈육, 엄부(嚴父) 같은 단어 뒤에 숨기도 했던, 물리적으로 끔찍하며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밑바닥부터 파괴하는 ‘아버지폭력’이다.

 

저자의 가족은 아빠, 엄마,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 모두 다섯 식구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직장생활과 자영업을 한 아빠, 일본 섬마을 출신의 엄마, 여동생 여름이, 남동생 진형이. 저자는 첫째 딸이다. 


"나는 하얀 도화지를 앞에 두고 남들이 칠해주는 대로 칠해지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칠해보라면 안절부절못하며 옆 사람 도화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아이. 책상 앞에 오래도록 앉아 수학 문제 풀 줄만 알았지 인생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이. 그러다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구석진 작은 모퉁이부터 내가 색을 정해 칠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빠가 말하는 길로 갔어도 얻는 게 없지는 않았겠지만 이렇게 계속 뒤틀린 채 마리오네트처럼 살아가다간 내가 끔찍하게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될 게 뻔해 보였다. 이성적인 여동생 여름이와 달리 감정 변화가 심하고 불안이 많고 예민했던 나는 그렇게 계속 배우고 마음을 고쳐먹고 훈련시켜야 바뀔 수 있었다."

 

이 식구의 가부장인 아빠의 폭력은 저자가 대여섯 살 때부터 시작됐니다. 끔찍한 폭력과 슬픔 가득한 장면이 등장할 것 같지만, 작가는 의외로 차분하게 글을 써 내려 간다. 이 차분함 밑에 어떤 말들이 적혔다 지워졌을지, 다 알지 못한다. 다만 살아서 끝끝내 어둠 속에 엉킨 경험을 하나씩 풀어낸다. 

 

대부분 사람들은 ‘가족’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가정 안에는 날카로운 창살이나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그 벽은 상당히 높고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듯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엄마는 심리적인 종속뿐만 아니라 법적(결혼제도)으로도 경제적으로 매여 있기에 쉽게 탈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돌봐야 하는 지난한 과정, 아무리 치료를 받는다 해도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경험들. 저자는 앞으로 가는 것 같다가 갑자기 뒤로 후퇴하는 일상까지 솔직하게 서술하고 있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아버지 폭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 이렇게 세 가지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폭력의 체계 안에서 한 사람이 피해자이며 가해자이고, 결국 방관자 역할까지 할 수밖에 없음을 이 책이 잘 보여즌다. 


이제 우리 사회도 ‘아버지’가 문제라고 말할 때가 됐다. 구체적인 가해자가 누구인지 적시할 때도 됐다. 저자는 끝까지 차분한 톤,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언어, 경험에 대한 지적인 해석을 담아냈다. 특히 아버지의 언어로 불리는 ‘철학’과 ‘지식’을 통해 ‘아버지폭력’을 드러내고 해석한다.

 

저자는 자기 가족 이야기를 쓰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꼼꼼하고 냉철하게 분석해낸다. 그러면서 희생자와 생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거기에 맞선다. 다른 희생자를 설득하고 돕는다. 그리고 마침내 적을 쓰러뜨린다. 나아가 적을 이해하고 구하려 나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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