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의 젠더풀월드] 누군가 나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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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의 젠더풀월드] 누군가 나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다면?

젠더는 사랑, 결혼, 가족 구성, 출산, 양육, 노령화를 포함한 사적인 영역부터 경제, 종교, 정치, 미디어, 학교 등 공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강력하게 작동하는 ‘체제’다. 젠더는 인간을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범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도 작동한다. 이렇게 젠더 이분법이 만드는 사회가 성별화된 사회(gendered society)다. 본지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이러한 이분법에 의문을 던져보고,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한 젠더 관점의 고민과 방향을 담은 저작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여성스러움을 포기해야만 여자로서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긴 머리의 여성이든 짧은 머리의 여성이든 머리카락의 길이는 상관없다. 사회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도록 예쁘게 꾸민 여성이든 그렇지 않은 여성이든 모두 상관없다. 


여성이 왜 예뻐야 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가지는 권리’와 대우는 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간에 누구나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런데 여성들은 당연한 것을 되찾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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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이 어린 여성들을 이토록 극단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남자? 기득세력? 아니, 바로 '우리'다. 

 

<내가 왜 예뻐야 되냐고요>(플로렌스 기본 지음, 우혜진 옮김, 용감한까치 펴냄)는 여성의 권리를 남녀 대립의 프레임에만 가두려 드는 우리 사회에 보기 좋게 ‘사이다’를 날려줄 ‘Z세대 페미니즘’ 책이다. 


페미니즘을 공격적이고 갈등 지향적인 사상으로 여기는 지금의 인식을 단번에 부수는 책으로, 여성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똑같이 존중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을 재미있고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바라보는 인식 또한 기존의 주된 흐름과는 다르다. 기득권 세력인 남성을 비난하는 대신, 그들을 기득권 세력으로 만든 우리 사회에 책임을 묻는다.


여성 혐오를 가부장제 및 자본주의 사회의 오랜 세뇌로 인한 유물로 간주하고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변화를 촉구한다. 


남자들만 여성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도 여성을 혐오한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가부장제의 세뇌와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남녀 모두를 해방시킬 수 있는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을 Z세대만의 생각과 지식으로 소개한다. 


주장은 굉장히 직설적이고 내용은 매우 솔직하지만 논지를 전개하는 과정이 매우 재미있고 유쾌하다. 오늘부터 나는 ‘나’와 데이트하기로 했다와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높이는 법을 조언한다.


물론 이 책은 사회에 원인을 돌린 후 ‘모두 변해야 한다’는 두루뭉술한 주장만 하다 끝나지 않는다. 여성을 포함해 차별받고 ‘가스라이팅’ 당하는 모든 개인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매우 ‘실천적인 방법’들을 상세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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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오랜 시간 무시돼왔던 ‘동의’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재정립하는 것부터 자신만의 ‘바운더리’를 만들고 지키는 방법, 가스라이팅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 등 실제적이고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타의 페미니즘 책과는 다르게 때때로 여성을 혼내기도 하고 여성의 행동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 책은 오랫동안 상처받아 온 여성들을 너무도 따뜻하게 안아준다.


실제로 저자는 ‘성폭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오랜 시간 받아온 가스라이팅과 남자 중심의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제대로 된 신고도 하지 못한 생존자다. 

 

그런 그녀는 이 책을 쓰는 이유에 대해 “당신에게 그때 내게 필요했던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면서 "대부분의 여성이 매우 끔찍하고 충격적인 경험을 한 후에야 ‘바운더리’나 위험을 알리는 ‘붉은 깃발’에 대해 배우게 된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무 힘든 경로로 배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 책을 쓴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