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풀월드] '세계 구하기' 앞서 여성은 누굴 구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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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풀월드] '세계 구하기' 앞서 여성은 누굴 구해야 하는가

젠더는 사랑, 결혼, 가족 구성, 출산, 양육, 노령화를 포함한 사적인 영역부터 경제, 종교, 정치, 미디어, 학교 등 공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강력하게 작동하는 ‘체제’다. 젠더는 인간을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범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도 작동한다. 이렇게 젠더 이분법이 만드는 사회가 성별화된 사회(gendered society)다. 본지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이러한 이분법에 의문을 던져보고,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한 젠더 관점의 고민과 방향을 담은 저작을 분석한다. <편집자주>

  • 홍성민 slide7@hanmail.net
  • 등록 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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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데일리] '가정에서 사람들은 위험한 살충제와 제초제를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천연덕스럽게 그런 행동을 하지만 독성은 그렇지 않다. 또 흉측한 인간-동물 하이브리드들(인간처럼 생긴 거대 바퀴벌레, 매혹적인 고양이-야수 여성)이 출현하는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충격에 빠트리는 공포영화들을 보라. 그러한 영화들은 언제나 하이브리드를 물리치고 승리감에 도취된 ‘인간’의 초월성으로 막을 내린다. 전지구적 온난화를 사적인 ‘믿음’의 문제로 치부하는 우파의 온난화 부정 전략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전지구적 온난화를 ‘믿든지’ 아니든지 선택할 권리가 있기라도 한다는 듯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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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우리 사회에 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높아졌다고 해도 건강한 몸이라는 일차적 차원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며 의료, 운동, 섭식의 차원에서나 다뤄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점차 더 다양하고 강해진는 화학물질들의 존재와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 환경 이슈들 가운데 우리는 건강의 문제가 내 몸 하나를 보살핀다고 해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새집증후군, 방사능 우려 수산물, 초미세먼지 등을 통해 몸이 과학기술, 정부정책, 정부의 외교력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태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스테이시 앨러이모의 <말, 살, 흙>은 우리의 몸과 몸을 둘러싼 환경을 전반적으로 사고하게 해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켜 줄 수 있겠다.

이 책은 몸이 과학, 기후, 환경과 맺는 관계를 ‘횡단-신체성’ 개념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는 신유물론과 생태학, 페미니즘을 결합해 설명하는데, 차별된 방법론만큼이나 흥미로운 일화들이 눈길을 끈다. 
 
이는 그저 추상적 이론에 머물지 않고 여성의 유방암이나 노동자계급의 폐암과 같은 여러 질병의 일화를 여러 문학 작품 속에서 끌어와 자세하게 다룬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몸을 환경 외부가 아닌 환경 안에 위치해 놓으면서 생태학과 페미니즘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오래 전 몸을 바라보는 학계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구성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몸은 정신이 주무를 수 있는 찰흙 같이 생가됐다. 푸코의 훈육적 몸이나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젠더,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 등이 구성주의적 이론의 대표격이다.  
 
오랜 동안 이런 관점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몸의 물질성을 회복하고 담론화할 수 있는 방법론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 등장한 신유물론은 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는 평가다. 
 
이른바 ‘몸적 전환’을 맞은 뒤 몸은 그 자신이 이미 여러 유해물질에 항상 노출돼 있다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물질을 변형하는 인간은 그런 물질의 힘에 의해 변형을 당하기도 한다. 이에 몸의 위상을 복원하는 데 있어 몸을 둘러싼 환경을 보는 것은 필수가 됐는데, 생태학은 우리의 몸을 살피는 데 간과할 수 없는 분야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과 페미니즘의 관계는 특별하다. 서구에서 여성의 신체성은 자연과 강력하게 관련돼 있었기에 페미니즘은 늘 자연이라는 유령에 시달려 왔다. 그만큼 페미니즘 이론은 자연에서 여성을 분리시키기 위해 힘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심적인 페미니즘 개념들은 자연과 문화를 대결시키는 데 집중했다. 페미니즘의 중요한 개념인 섹스와 젠더의 구분 역시 자연과 문화 사이의 날선 대립에 토대를 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페미니즘 이론이 자연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특정 그룹과 비인간 생명체에게 모욕과 침묵을 강요하기 위해 만들어져 왔던 자연-문화, 몸-마음, 대상-주체, 자원-행위능력과 같은 젠더화된 이원론을 타파하기 위해 힘써야 했다고 강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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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라는 유령을 내쫓는 유일한 길은 역설적으로 그것들에 살을 주고 충분히 물질화하도록 허용하는 동시에 물질화의 정밀한 과정에 주의를 기울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책은 이같은 흐름 속에 위치하는데 신유물론과 생태학, 페미니즘을 결합해 문화에 대한, 신체에 대한, 환경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과거 미국의 한 매체는 현지 환경보호청이 인공·합성·독성물질을 다량 함유한 미국 시민들의 몸이 산업 쓰레기로 재분류됐다는 경고를 속보로 냈다. 현대의 세제, 실리콘 임플란트, 가공 치즈 식품 등으로 일어난 변화로 인해 인간의 피부조직이 국토의 표토와 접촉하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염된 땅이 인간에게 유해하다는 것이 아닌 오염된 인간의 몸이 땅에게 유해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성물질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보면 결과적으로 환경보건, 노동운동, 환경주의, 장애연구, 인권, 반지구화, 소비자 인권, 아동복지 등의 활동이 상호 연결돼 있음을 알게 된다. 
 
저자는 이렇게 연결된 수많은 분야와 대상을 '몸된 자연’이라 부르는데, 이는 이론적으로 도발적이며 정치적으로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아와 세계를 분리된 개체로 이해했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서다.
 
저자는 이같은 논의를 펼쳐내는 데 있어 다양한 소재와 문학작품을 소환한다. 지난 1900년대 초반 노동계급의 활력이 스며든 에로틱한 자연의 몸을 묘사한 메리델 르 쉬에르와 규폐증으로 죽어가는 광부를 묘사한 뮈리엘 뤼케이서의 작품 세계를 대조한다. 
 
그러면서도 퍼시벌 에버렛의 소설 '분수령'을 통해 환경정의의 위기 앞에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정치 투쟁에 의해 얼마나 복잡다단해지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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