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BOOK돋움] 1950년대 여성 화학자가 삶을 살아내려 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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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BOOK돋움] 1950년대 여성 화학자가 삶을 살아내려 했던 이유

본지가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독서로써 마음을 힐링하는 '책 읽는 힘, BOOK돋움'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일상생활이 멈춘 상황에서 마음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 생활이 최고의 기회라 여겨집니다. 독서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부모와 자녀 세대가 소통하는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며, 책 읽는 분위기가 잔잔한 물결처럼 번져 코로나 블루가 슬기롭게 극복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 이은진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2.0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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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봐요. 매일. 자신이 최우선이 되는 시간을 가지는 거죠. 오롯이 나만의 시간요."


우리말로 ‘화학개론 수업’, ‘화학에서 배운 것’ 정도로 풀이되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의 주인공은 화학자다. 여성 과학자가 거의 없던 1950~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가 파도를 딛고 일어나는 서퍼처럼 인생에서 필연적인 역경에 맞서는 과정을 통해 좌절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보니 가머스의 <레슨 인 케미스트리> 속 주인공은 이제껏 보지 못한 우아하고 강인한 여성 캐릭터다. 독학으로 학사 과정을 마치고 헤이스팅스 연구소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밝혀내지 못한 ‘진화 이전’ 분자의 비밀을 연구하는 화학자로 묘사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당시가 1955년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발코니에 앉아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세상이었으며 임금 노동자라고 해도 사무 보조원나 행정직원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이다. 


연구소 동료들은 엘리자베스를 동등한 화학자가 아닌 연구 보조원이나 커피 심부름을 담당할 사람쯤으로 생각한다. 단 한 사람이 제외되는데 그는 바로 노벨과학상 후보 캘빈 에번스라 인물이다. 유능하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운 섬이나 마찬가지였던 이들은 영구적인 화학 결합처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과학자로서의 이름과 연구를 지키기 위해 ‘결혼 없는 동거’를 선택한 엘리자베스는 캘빈이 사고로 죽자 비혼모가 되는 운명을 맞는다.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연구소에서 방출된 엘리자베스는 쇠지레로 직접 집 부엌을 부수고 개조해 실험실로 만들고 연구를 이어가는 의지를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녀는 남들이 말하는 ‘화학자 지망생’이 아닌 이미 훌륭한 화학자였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비혼모인 그녀는 딸이 다섯 살이 되던 무렵 우연찮은 계기로 TV 요리 프로그램 '6시 저녁 식사'의 MC로 발탁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심지어 미국 부통령까지 그녀의 팬을 자처하는 미최고의 슈퍼스타가 된다.


물론 그녀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거짓 종말론을 설파하며 성물을 판매하는 부흥사였던 그녀의 부모는 자녀들을 방치했고, 동성애자였던 오빠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세상과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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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동반자였던 캘빈의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부모가 사고로 죽은 뒤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는 습관처럼 “살아갈 날이 많으니까 힘내자. 내일은 달라질 거야”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보통 이런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겪는 지난한 여정은 한숨을 자아내며 읽는 이로 하여금 지치게 하기도 하지만 주인공인 그녀를 지켜보는 건 그렇지 않을 수 있겠다. 바로 엘리자베스 스스로가 조금도 지칠 줄 모르는 인물이어서다. 그녀는 절대로 주저앉아 신세 한탄이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사실에 근거해서만 판단을 내리는 합리주의자이자 과학자여서다. 때로 외부에서 “너는 그 연구를 할 만큼 똑똑하지 않아”라는 공격을 받아 자기 확신이 흔들리더라도, 과학자다운 합리주의에 따라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곤 한다. ‘경험적으로 볼 때 내가 이 연구를 할 수 있는가?’에 답은 ‘예’란 식이다. 그녀는 각종 의문에 실행으로 답하는 인물이다.


60년대에 가정주부의 식사 준비는 허드렛일로 취급받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요리야말로 ‘새 에너지를 창조하고 새 세대를 번성시키는 진지한 화학 실험’이라고 이야기한다. 여성이 대부분인 '6시 저녁 식사'의 방청객들은 엘리자베스의 말을 엄청난 집중력으로 받아 적다가 야간학위과정에 등록하거나 의대 예비과정에 입학하는 일도 일어나게 된다.. 


아울러 다이어트 보조제를 먹지 말고 스포츠로서 조정을 하라는 그녀의 한마디에 갑자기 조정 클럽이 난생 처음 여성들로 붐기기도 한다. 그녀에게 있어 어떤 변화도 놀랍지 않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화학적으로 언제나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여서다.


엘리자베스는 ‘요리는 화학이다’고 설파하며 요리가 모성이 담긴 무언가라는 신화를 타파하고 화학 지식을 접목해 요리법을 전수한다. 그러나 사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이 배우는 것은 요리도 화학도 아닌 것이다.


그녀는 각자가 무한한 잠재력을 통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돕는다. 인종, 나이, 계급, 성별 등 구태의 범주로 타인이 자신을 분류하게 두지 말자는, 무신론자이자 합리주의자이자 과학자인 엘리자베스의 선언은 오늘은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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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분명 가상의 이야기이건만 천선란 작가의 <노랜드> 속 인물들은 당장이라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로 뛰쳐나올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아마도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는 작가의 마음이 소설집 곳곳에 온전히 담겨서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오게 될 이곳이 정말 ‘그들 세계의 밖’일까. 혹시 ‘안’보다 더 깊은 ‘안’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한 소설가의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우리 안에 있는 느리고 약한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다면 독서에 있어 그것보다 멋진 뜻은 없겠다. 천선란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묻는다. 바로 ‘언니는 나를 믿어요?’라고. 

 

이러한 물음은 ‘나를 믿어요?’라는 확인으로도, ‘소설을 믿나요?’라는 질문으로도, ‘소설이 느리지만 반드시 이 세계를 더 나아지게 한다는 걸 믿으세요?’라는 외침으로도 들릴 수 있다.


그렇게 우리가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두 손에 꼭 쥔 채 읽어나갈 때, 소설 바깥에서 불어온 시원하고 파리한 바람은 우리의 눈을 멀게 했던 까맣고 역한 불행을 저만치 치워버릴 수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푸른 점들로 가득한 저 너머를, 가상의 세계가 아닌 수많은 진짜 이야기가 묻혀 있는 아름다운 땅 ‘노랜드’를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는,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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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펄럭이는 날개가 아니라 펄떡이는 심장이라는 것을// 진정 한 비상이란/ 대지가 아니라 나를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인생에는 창공을 날아오르는 모험보다/ 절벽을 뛰어내려야 하는 모험이 더 많다는 것을.’


양광모 시인은 일상의 언어로 삶을 그려내는 누구라도 한때는 시인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평생을 시인으로 살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시인이 되는 순간이 온다는 지론이다. 


그 순간은 식은 커피를 마시거나 딱딱하게 굳은 찬밥을 먹을 때이거나 살아온 일이 초라하거나 살아갈 일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이거나 진부한 사랑에 빠졌거나 그보다 더 진부한 이별이 찾아왔을 때일 것이다. 그럴수록 가슴 뭉클한 순간을 찾아내려는 과정이 우리를 시인의 자리로 이끈다는 주장이다. 


시는 ‘발견’에서 오는 것이다. 시인은 일상의 발견에서, ‘나’의 발견에서, 어제와 오늘의 발견에서 ‘삶’으로, ‘당신’으로, ‘내일’로 시적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그 여정에서 시인이 발견한 인생의 비밀이란 바로 어쩌면 삶이라는 건 종이비행기처럼 날아다니는 시간보다 접는 시간이 긴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언뜻 보면 진부하고 평범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채롭고 특별한 순간을 찾게 된다. 걱정과 고민으로 점철된 일상 사이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징검다리처럼 놓는 마음으로 풀이된다.

 

시인은 <양광모 대표시 101>에서 인생이란 극복하고 이겨 내야 하는 것일까, 통과하여 나아가는 것일까라는, 지금 여기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당장의 극복과 반전을 꾀하는 말이 아니라고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