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BOOK돋움] 베드로는 왜 막달라 마리아마저 부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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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BOOK돋움] 베드로는 왜 막달라 마리아마저 부정했나

본지가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독서로써 마음을 힐링하는 '책 읽는 힘, BOOK돋움'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일상생활이 멈춘 상황에서 마음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 생활이 최고의 기회라 여겨집니다. 독서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부모와 자녀 세대가 소통하는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며, 책 읽는 분위기가 잔잔한 물결처럼 번져 코로나 블루가 슬기롭게 극복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 이은진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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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지데일리]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 제자 공동체 안에서 ‘왕따’ 신세였다. 특히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드러내놓고 적대했다. 이렇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으니, 예수의 죽음 이후 막달라 마리아가 철저히 배제된 건 당연한 수순 아니었을까.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어 교회 제도를 이루고, 부활에 의심을 품었던 사도들마저도 교회 주류 전통 속에서 왕좌에 올랐을 때, 예수의 가장 신실한 사도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열두 제자에도 포함되지 못한 채 제도권 밖으로 밀려났다.‘

 

일반적으로 그림은 자신을 잉태한 시대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고, 당시를 틀어쥐던 권력자를 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항상 그림의 힘을 활용해 자신들의 통치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어찌보면 예나 지금이나 예술이 돈과 권력을 떠나 독립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닐 터다. 화가들은 자신을 후원하는 권력자와 그림을 사는 재력가에 맞춰 그림을 그려야 예술가로서의 삶은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통상 미술계에서 흑인은 백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쓰였다. 이는 마네의 '올랭피아'와 루벤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가 이를 대변해준다. 화가 바스키아는 이런 미술계에서의 흑인의 쓰임에 대해 비판하고 흑인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올랭피아의 하녀'를 완성했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와 뭉크의 '병든 아이'를 통해서는 우리 사회가 아픈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병든 사람은 죄를 지어 벌을 받는다거나 지극하게 개인적인 불행으로 여겨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질병이란 불평등한 사회구조·문화·빈곤 문제 등이 스님 것이며 아픈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플라톤에 의하면 자궁은 짐승 안의 짐승이었다는 말도 있다. 얀 스테인의 그림 '의사의 왕진'을 살펴보면 자궁 혐오에 대한 오랜 역사를 접할 수 있다. 

 

오늘날도 여성은 월경을 하면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해 히스테릭해진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이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자궁을 혐오해왔던 역사가 이어져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여성에게 바람직한 어머니상을 강요하기도 했다. 세간티니는 '욕망의 징벌'에서 성모 마리아와 같지 않은 부도덕하고 나쁜 어머니들에게 벌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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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휘슬러는 '회색과 검정의 조화'를 통해 평생을 헌신했던 어머니를 매정하고 차갑게 묘사했다. 모성이란 지나쳐도 모자라도 안 된다는 이상한 모성 신화의 강요가 여성들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소유물로 인식되기도 했다. 윌리엄 호가스의 '그레이엄 집안의 아이들'에서는 당대 부유한 집안의 어린이들이 어른처럼 코르셋을 입거나 꽉 조이는 정장을 입어 소화 장애를 겪었다. 반면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은 값싼 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인간이 덜 된 인간이란 몰상식도 횡행했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비판한 화가들도 있었다. 매리 커샛은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를 거스르고 비혼을 선택하며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선택한 인물인데, 이같은 모습은 그의 그림 '마차를 모는 여인과 소녀'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환경오염에 대한 현실을 그린 예술가도 있었다. 마네는 '아르장퇴유'를 통해 센 강에 뜬 보트를 배경으로 한가로운 파리지앵을 그린 것 같으나 실제로는 아르장퇴유의 염색 공장에서 배출된 폐수로 인해 강물이 쪽빛으로 변한 것을 묘사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는 '눈먼 소녀'에서 애처롭고 아름다운 장애인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으나 우리가 장애인에게 바라는 시선에 대해 생각치 못했다. 

 

이처럼 당연하다고 여겼던 아름다움이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되면 어느 순간 낯설게 보기가 시작된다. 이유리의 <기울어진 미술관>은 오역되고 사라진 이들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그간 예술 세계가 남성중심적·권력적 시선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 아무런 거름망 없이 자연스럽게 흡수해왔던 것들에 의문을 품기를 바라고 있다. 예술권력에 저항하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동물권·환경 문제·투기 등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옳고 그름에 관해서도 단순히 이분법으로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닌 예술의 참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그 안에서도 회색지대가 있음을 알려준다. 힘없는 자들이 역경을 딛고 무언가를 해내는 것에 감동을 얻는 시선이 과연 이들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선인지를 되묻게 한다.

 

특히 그림이 빚어지기까지의 묵인돼왔던 희생들과 불평등이 아름다움으로 박제된 순간을 포착하며 그림 속 존재들을 해방에 이르도록 이끈다. 아울러 자본 권력에 저항하는 오늘날 예술가들의 기울어진 판도가 뒤집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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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믿음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늘 유쾌하지만은 않다. 속마음은 보통 그리 아름답지 않으며 인정하기 어렵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 그 비밀의 공간에 접근해온다면 우리는 들키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방어하게 된다. 평가받는 분위기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숨겨두고 싶은 나의 못난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게 어떤 모습이든 일단은 비난하지 말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적잖은 사람들이 지금 하는 선택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매번 같은 선택을 반복해 고통받곤 한다. 그렇다고 혼자선 막막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수도 없는 사정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주 사소한 일로도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 화를 낼 때가 있다. 하지만 이내 후회한다. 아무도 나라는 형편없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자괴감, 다른 사람의 행복한 삶을 볼 때 느끼는 박탈감에 시달린다. 

 

막상 정신과에 가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갈 데까지 갔나 싶다. 약을 먹게 되면 어쩌지, 사실은 다들 이러고 사는데 상담을 받아 문제가 더 커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생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는 것은 해답은 아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구해야 하는 것이다. 정신과는 그런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권아혜의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는 내 마음이라는 깜깜한 동굴을 헤쳐 나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는 정신과를 마음의 셰르파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정신건강과 회복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필요한 조언과 도움을 주는 곳인 셈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만의 그림자, 블랙독이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있다고 해서 그 그림자가 하찮은 것은 아니지만 창피하거나 이상한 것도 아닌 것이다. 완성형 인간이 되기에는 한참 멀었지만 조금은 이상하고, 엉망이고, 문제 있는 내 모습마저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마음속 고통을 안고 사는 누구든 공감과 위안을 받고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저자는 우울, 불안, 무기력함, 분노 등 우리가 흔히 겪고 있는 심리적 문제를 설명한다. 나아가 그 문제가 자신으로 인한 것인지 타인로 인한 것인지 구분해 조금 더 편안해지고 괜찮아질 수 있는 해결책을 이야기한다. 각자의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고 어려움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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