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냇가에서] 마음은 복사꽃밭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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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냇가에서] 마음은 복사꽃밭 같아서

정화진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사반세기 넘는 긴 시간 침묵 깨고 돌아온 시인
이전 시집 모티프서 훨씬 확장된 시공간 선봬

  • 이은진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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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그녀들 말의 향기로 저 복사꽃 핀 산자락이 

색채가 끝난 시간들 또는 육체들이 상승한 자리 위에 얹힐 때, 

인간의 마음은 분홍의 꽃밭 같아져서 

말마저 잊고 향기로 가득 세상을 채우리라

마음이 복사꽃밭 같아서

하늘 아래 팔 벌려 마음은 꽃 피는 바다와 같이 출렁거려서

한결같이 복사꽃, 사월의 복사꽃밭만 같아서

향기로운 말들이 꽃 피는 날에

- '마음은 복사꽃밭 같아서'에서

 

사반세기 넘는 긴 시간의 침묵을 깨고 돌아온 정화진 시인. 그는 이전 시집들에서 몇 가지 모티프를 이어오되 이번엔 더 확장된 시공간을 무대 삼아 새로운 시세계를 선보인다.

 

이번 시집에서 도드라지는 변화는 단연 화자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주체로서의 ‘나’ 또는 ‘나’의 주관적 진술, 고백적 어조가 상당히 줄어들고 그 자리에 수많은 ‘너’, ‘그대’, ‘그녀’가 나온다. 

 

그러면서 화자의 내부에서 외부로, 인간계에서 그 너머로, ‘지금 이곳’에 붙박이지 않은 채 대상을 호명하고 두루 살피고 말을 건네는 시편들은 시인의 시세계가 훨씬 더 다층적이고 다차원적인 곳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일러준다. 

 

이는 확실히 이전보다 두려움 없이 자유로워진 것처럼 느껴지는데 성취로서의 자유가 아닌 무력감과 상실감을 이겨낸 자의 그것을 토대로 다른 이의 존재를 경건하게 바라본 자의 연민과 겸양의 태도로 보인다.


그래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황소야 무거운 황소야 저 나뭇가지 좀 보아

날개가 돋아나려나봐

붕대를 풀고 날아오르는 저 희고 흰 나비떼 좀 보렴

그래, 나비 또 나비야

그런데 말이지

그게 문제야 넌 아니?

_ '나비 또 나비'에서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는 순간이 해방의 순간만은 아니다. 이에 시인은 “그게 문제야 넌 아니?”라는 마지막 한 문장으로 갈음한다. 익숙한 은유와 재현 역시 하나의 억압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쉽게 타자화하고 규정지었던 관계들이 또다른 이미지의 공간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숙고를 거쳐 다시 돌아온 시인이 손에 쥔 것은 결의나 야심이 아닌 ‘정결함’과 ‘공백들’, ‘고요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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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회백색 겨울 정원에 구근식물을 심고 근본적인 무력감에 기대기 위해 베르그송을 읽었다고 한다. 사랑과 죽음과 무지와 맹목을 잃지 않았고 결국 무력함의 정원에 첫 스노드롭 꽃대가 솟는 것으로 시집은 마쳐진다. 

 

평론가 황현산이 “강의 하구는 그 욕망의 무덤들이다. 파도를 타고 한 번 출렁인 욕망은 다른 파도에 그 욕망을 넘겨준다. 파도가 그렇게 출렁이고 ‘분묘이장공고’가 그렇게 펄럭인다. 그러나 그 욕망의 파도 아래에는 시들지도 않고 떨어진 ‘동백’도, 그 순결한 욕망도 함께 가라앉아 있다”라고 쓴 두번째 시집 표제시 속 ‘강’, ‘파도,’ ‘분묘이장공고’, ‘동백’의 이미지들은 시의 화자가 나이들고 그를 둘러싼 세계의 성분이 달라지는 것과 함께 변화했다.

 

오랜 시간 기다려온 시인이 이번 시집을 기점으로 찬찬히 펼쳐 보일 새로운 풍경의 정원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28년 만에 묶는 시집으로, 우리를 자신의 내면 공간 안으로 끌어들여 한 인간의 유년기를 동시에 체험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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