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의 젠더풀월드] "남자? 여자?" 호기심 어린, 혹은 못마땅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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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영의 젠더풀월드] "남자? 여자?" 호기심 어린, 혹은 못마땅한 질문

젠더는 사랑, 결혼, 가족 구성, 출산, 양육, 노령화를 포함한 사적인 영역부터 경제, 종교, 정치, 미디어, 학교 등 공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강력하게 작동하는 ‘체제’다. 젠더는 인간을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범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도 작동한다. 이렇게 젠더 이분법이 만드는 사회가 성별화된 사회(gendered society)다. 본지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이러한 이분법에 의문을 던져보고,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한 젠더 관점의 고민과 방향을 담은 저작을 분석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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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데일리]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계급·인종·민족·종교·장애·성별·섹슈얼리티 등 미세하고 복잡하게 얽힌 권력구분선을 따라 살아도 될 생명과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 갈리고 ‘인간’의 이름 안에 거주할 수 있는 존재와 그렇지 못한 존재가 갈리는 경험을 겪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철거민’이란 이름으로 내려앉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폭력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는 상황, 정해진 국가경계 안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한 인간의 실존 자체가 불법으로 규정되는 상황, 소위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도,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와 삶을 함께 꾸릴 권리도 박탈당하는 상황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삶’, ‘생명’, ‘인간’ 등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범주들은 오히려 이러한 예외적 존재들의 생산을 통해 그 자연화된 위상을 굳건히 만들어간다. 전혜은의 <섹스화된 몸>은 이러한 ‘섹스화된 몸’을 중심으로 배제의 정치학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려낸다. 

 

‘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몸’을 정의 내리는 과정에 작동하는 권력들의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몸은 자명한 자연적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몸만을 ‘자연스러운 몸’이라는 위상에 올리고 이 밖에 몸들은 인간의 몸이 아닌 영역으로 추방시키는 배제의 폭력을 통해 구축되는 것이라 하겠다. 

 

어떤 몸을 당연시하느냐의 문제는 곧 누구를 인간주체로 인정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몸의 문제는 주체 구성의 문제와 관련되면서도 생존의 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몸에 대한 질문은 단지 존재론적 질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식론적이면서 정치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몸과 섹스가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항상 함께 출현하고 경험된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섹스화된 몸’이란 개념을 들었다. 다만 이는 통상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돼왔던 게 사실이다. 

 

여자는 아침에 출근하기 전 한번 몸무게를 재고 집에 돌아와 저녁에 또 다시 몸무게를 재곤 한다. 이렇게 살이 찐다거나 컨디션이 나쁘다거나 피부가 푸석푸석하다거나 하는 등 표면적인 변화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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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몸과 마음은 어떻게 연동하는지, 특히 생리와 배란과 관련된 호르몬 주기는 어떻게 변화하며 그것이 나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몸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은 남여 이원론에 기반해 있다고 한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다면 남자일까, 여자일까 하는 호기심 어리거나 못마땅한 물음을 한다. 

 

남여 이원론은 인간의 몸을 읽어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기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섹스화된 몸을 남여의 몸과 등치시키는 것이 다른 종류의 몸들과 가능성들을 배제시키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인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페미니즘 몸 이론에서 크게 두 갈래의 다른 방향을 대표하고 있는 학자들, 엘리자베스 그로츠와 주디스 버틀러의 몸 이론은 비교 분석 대상이 된다. 그로츠와 버틀러를 평면적으로 병렬하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몸 이론은 일부 부분에서 중요한 공유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상호 공존 가능한 논의들은 아니다. 

 

그로츠의 몸 이론이 지금까지 나온 육체적 페미니즘의 가장 주류가 되는 주장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한다면, 버틀러의 이론은 그로츠에게서는 질문되지 않고 남겨져 있는 것이나 그로츠가 이론의 정립을 위해 배제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이에 그로츠에 대한 버틀러의 보완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을 넘어서 그로츠와 버틀러의 비교를 통해 페미니즘의 자기 완결성을 비판하고 그 기반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이같은 탈 안정화는 페미니즘 자체를 붕괴시킬 것인가, 페미니즘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하나의 질문 방식이기도 하다.

 

섹스화된 몸을 남여 이원론을 넘어선 개념으로 재의미화하는 작업은 보편적인 범주들을 현재의 규범적인 ‘현실’과 여기서 배제된 다른 ‘현실들’ 간의 싸움에 열어놓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토대라고 믿고 있던 것을 뒤흔들고 재배치하는 정치적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섹스화된 몸이 반드시 남성과 여성의 몸만을 가리킬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면, 오히려 그러한 연결이 권력의 문제와 얽혀 있는 것이라면, 섹스화된 몸이라는 개념은 남과 여라는 이원론이라는 강제적 속박과 맞물려있지만 꼭 그것과 일치하지는 않는 다른 존재들과 가능성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재의미화될 수 있다는 남다른 지론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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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필진의 칼럼과 기고 등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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