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BOOK돋움] 음악, 죽음, 흑인에 얽힌 가슴을 짓누르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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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BOOK돋움] 음악, 죽음, 흑인에 얽힌 가슴을 짓누르는 이야기

  • 이은진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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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기 전까진 죽지 않아 

하닙 압두라킵 지음, 최민우 옮김, 카라칼 펴냄


‘이모 장르에서, 특히 자기가 시인인 줄 아는 매력적인 프런트맨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여성 혐오는 문제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겨졌다. 우리 중에 노트에다 옛 애인에 대한 뭔가를 조용히 긁적여 본 적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성별을 불문하고 말이다. 이는 어느 정도는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 중 하나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듣는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노트가 대중에 공개되고 수천 명들 앞에서 노래로 불린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게 대체로 남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진짜 근본적인 문제는, 이 남자들이 우리 모두가 더 배우고 더 알게 되기 전에 가졌던 ‘실연에 따른 울화’를 극복하지 못한 채 나이를 먹을 때 생긴다.‘


음악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순전히 창작자의 것이다. 그러다 어떤 노래가 세상에 나오면, 그 음악은 모든 이의 것이 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곡의 의도를 이해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음악이 남긴 희미한 메아리까지 듣는 일은 모두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음악이 품은 의도를 넘어, 거기에서 인생을 듣는 일은 흔히 벌어지지 않는다. 

 

하닙 압두라킵은 그 일을 해낸다. 그는 사람들이 음악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듣는다. 곡이 가리키는 바가 아니라, 음악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듣는다. 또한 우리가 들었던 음악이 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었다는 사실을 듣는다. 우리가 듣는 음악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했으며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를 듣는다.


프린스의 슈퍼볼 콘서트 실황 무대를 다룬 에세이에서, 저자는 불멸에 가까이 다가갔던 한 예술가의 초월적 순간을 묘사한다. 이젠 유튜브 영상으로만 남게 된 그 신비의 시간을, 마술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그날 밤을 마법과 같은 문장으로 그려낸다. 


한편 에미넴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 짧은 만담은 흑인성(blackness)에 대비되는 백인성(whiteness)의 일면을 역설적으로 백인 래퍼의 성공담을 통해 드러낸다. 


“나는 시인이지만 동시에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혹은 그래서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도 비판적이 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내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거겠지요. 다만 누군가를 비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향한 사랑 또는 그에 대한 기대로부터 어긋난 실망에서 비롯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의 음악 비평은 부정적 입장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잦은 것 같습니다만, 그런 경우 비평가의 동기는 분노나 냉소, 질투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에 비평이라는 노력을 들일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어요. 나에게 비평이란, 사랑의 행위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겁니다. 물론 나의 이러한 방식도 가끔은 실패로 귀결되곤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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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수록된 39편의 에세이는 단순히 비판적 또는 호의적 자세를 견지한 비평문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랑에 기반을 둔, 사랑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다. 또한 사랑했으나 실패로 귀결된, 사랑했으나 실망이나 분노로 끝맺음한 이야기들이다. 압두라킵의 글은 논리적이고 정연한 태도와는 다소 거리를 둔다. 


그의 비평적 글쓰기는 감정 없는 분석을 지향하지 않는다. 문화비평의 과업 중 하나가 우리 사회의 조각난 삶의 양태들을 비평가 스스로가 선택한 주제와 긴밀히 이어 붙이는 작업이라면,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음악, 스포츠, 정치, 대중문화에 깃든 사연과 감정 들을 불러와 자신의 고유한 시적 언어로 재구성한다.


“현존하는 작가 중에서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하닙 압두라킵처럼 쓰는 이는 없다. 그래서 처음 하닙의 글을 읽었을 때는 그의 통렬한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작품의 중간 부분에 의해 느낌이 얼마나 크게 달라지는지 깨닫지 못했다. 가운데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이 에세이집에서 하닙은 우리를 텍스트의 한가운데로, 음악의 한가운데로, 작은 도시의 한가운데로, 문화의 한가운데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일단 그 안에 들어서면, 우리는 이전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상세히 보고 듣게 된다. 과장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억제되지도 않은 이 에세이들은 가장자리를 따라 실을 꿰듯 안팎으로 엮이는데, 이는 오로지 최고 수준의 에세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키에세 레이먼, 작가)


수록된 에세이들은 대부분 음악 이야기로 출발하지만, 오늘날 우리 삶과 문화에 얽힌 첨예한 이슈들을 거침없이 다룬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우리는 기억과 망각, 사랑과 폭력, 삶과 죽음 등이 음악과 함께 얽혀 있는 현실에 깊숙이 발을 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비통함과 연민에 젖어든 스스로를 맞닥뜨리고야 만다. 저자는 매사를 인간적인 공감,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을 가장 잘하는 작가다. 그의 글은 독자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조차 가슴을 짓누른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역동적 투쟁이자 세공되지 않은 몸부림이 되기도 한다. 희망을 꿈꾸기조차 어려운 시대, 압두라킵은 암흑을 뚫고 나오는 눈부신 섬광을 약속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지만 관대한 정신을 품고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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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의 세이지 

본디소 외 지음, 다산책방 펴냄


‘사현은 관측을 멈추지 않았다. 세이지는 울 것처럼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는 애절하고 또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고서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의 마른 눈가를 쓸어내리는 사현의 손을 붙잡아 그리운 듯 뺨에 비볐다. “바다에 가자. 지금 같이 봐야 좋은 바다야.”‘


다산북스와 밀리의 서재가 함께 주최한 SF문학공모전 ‘SF오디오스토리어워즈’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학 발굴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됐다. 


종이책 출간이 먼저였던 기존 문학상과 다르게 오디오북으로 선출간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으며, 독자 투표라는 파격적인 심사 방식을 적용해 독자와 작품 간의 거리를 좁혔다. 


다소 낯선 진행 방식과 매체, 처음 열리는 공모전임에도 3개월 동안 350여 편의 작품이 접수되었고, 치열한 심사를 거쳐 최종 6편의 작품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SF 문학의 최전선에서 활동 중인 소설가 이경희와 박문영, 평론가 심완선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신예 작가들의 찬란한 시작을 함께했다. 최종 선정된 6편의 작품은 모두 SF 장르의 외연을 띠고 있지만, 구성 성분이 제각각인 별처럼 각자 다른 빛을 발산한다.


대상 수상작인 <온 세상의 세이지>는 가상현실을 소재로 ‘두 사람이 만나면 두 세계가 충돌한다’는 말을 SF적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사랑하는 이의 감각으로 재구성된 세상의 질감을 주인공 사현이 온전히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는, 제아무리 단단한 눈물샘을 가진 사람이라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막기는 힘들 것이다. 


우수상을 받은 <사랑의 블랙홀.mov>는 우주 탐험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갈등과 선택의 문제를 다뤘다. <지구의 지구>는 시적인 문장과 환상적인 분위기로 익숙한 SF의 재료들을 독특한 맛으로 배합해냈다. <데드, 스투키>는 SF 장르의 흐릿한 경계에 서 있는 작품이지만, 그렇기에 가장 익숙하고 다정한 이야기다. <오래된 미래>는 소설 곳곳에서 느껴지는 성서의 숨결이 압도적이다. <저장>은 탄탄하게 구축된 과학적 설정에, 반전을 거듭하는 플롯으로 읽는 이를 몰아붙인다.


압도적인 절망의 상황에서, 기적처럼 찾아오는 생의 기쁨 사이에서, 우리는 이야기가 빚어내는 상상력의 힘을 늘 빌려왔다. 이야기가 생성해내는 수많은 기쁨과 슬픔, 그 안에 도사린 또 다른 가능성을 관측하러 온 여섯 명의 작가들을 환대해주시기를 기대한다.


<온 세상의 세이지>(본디소 지음)의  세이지와 사현은 몸을 뒤덮은 문신에, 주렁주렁 매달린 피어싱을 하고 독버섯처럼 겉모습을 위장하고 살아왔다. 


함께 살며 서로를 안식처로 여기던 시간도 잠시, 사현은 세이지에게 이별을 고하고, 상심한 세이지는 일본으로 돌아가다 사고를 당한다. 전과는 달라진 서로의 세계, 자신을 받아줄 곳을 찾아 떠난 세이지는 사현과 닿지 않은 지 오래다. 


그렇게 세이지의 얼굴도 희미해진 어느 날, 다국적 기업의 가상현실 개발부에서 사현을 찾아온다. 세이지를 만나달라는 부탁을 하러.


<사랑의 블랙홀.mov>(김채은 지음)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천문연구원장으로 취임하게 된 소영은 복구된 계정으로 영상 하나를 받는다. 파일의 확장자는 '.mov'로, 이 파일을 실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모두 사라졌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파일을 두고 씨름하던 소영에게, 블랙홀 유인 우주 탐사선 탑승 우주인 후보인 다정이 제안을 해온다. 자신을 도와주면 이 파일을 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 다만 24시간 안에 답을 달라고. 많을 걸 잃을 수도 있지만 소영은 기꺼이 수락한다. 약속한 주말, 좋지 않은 상태로 집에 찾아온 다정을 본 소영은 무언가 직감한다.


<지구의 지구>(배수연 지음)에서 오래전 연인 레이를 죽음으로 떠나보낸 희나는 미지의 숲에 도착한다. 누군가 정성스레 관리하고 있는 듯, 희귀한 식물들로 가득한 이 숲에서 희나는 ‘지구’라는 존재를 찾아야 한다. 


생명으로 가득해 보이지만 죽음이 머물러 있는 곳, 이곳의 중심인 ‘지구’는 연인 레이를 다시 만나게 해줄 마지막 희망이다. 그러나 ‘지구’를 찾는 여정은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고, 오랫동안 숲과 호흡해온 여자아이가 매번 희나의 앞을 가로막는데. 익숙한 SF의 재료로 빚어낸 섬세한 이야기가 생명의 가치와 존엄에 대해 다시 한번 물음을 던진다.


<데드, 스투키>(이서도 지음)에서 세연이 사는 방 두 개짜리 복도식 아파트의 베란다는 죽은 식물로 가득하다. 끈질기다는 선인장이나 스투키마저도 생을 저버리는 이곳에서, 세연은 자신을 거치는 것들이 모두 죽어버린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기이한 사고로 엄마도 세상을 떠난 지금, 세연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친구 승우뿐이다. 자신의 불행이 옮을까 승우를 멀리하며 진척 없는 연애를 이어가는 세연과, 그 곁을 살아 있는 것들로 채우는 승우. 죽음의 시간이 머무는 세연의 아파트에서 둘은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오래된 미래>(이중세 지음)에서 지독한 향락에 잠긴 도시, 인간의 모든 타락이 행해지는 그곳을 떠나온 소년 다그는 사막에서 양을 돌보며 산다. 우연히 만난 사내 게이브가 도시로 향한다는 말을 듣은 다그는 그와 동행을 약속하고, 도시의 입구에서 출입자를 감시하는 스타뎀은 마약이 불러오는 환상 속에서 악한 존재를 만난다. 


한편 도시에서 사막의 온정을 베풀며 살던 에이브러햄은 도시가 불타는 꿈에 시달리는데, 그 꿈의 끝에서 눈동자가 녹색인 사내에게 늘 붙들린다. 신의 두루마리를 따라 도시를 헤매던 게이브는 우여곡절 끝에 에이브러햄을 만나고, 에이브러햄은 게이브가 도시의 멸망을 전하러 온 천사임을 깨닫는다.


<저장>(홍인표 지음)에서 군대에서 첫 휴가를 받아 나온 수현은 할머니의 ‘저장장’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기억 단백질 데이터 수집 기술의 발달로 스캔한 뇌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게 되면서 〈저장〉은 새로운 장례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수현은 멋대로 값비싼 '저장'을 선택한 엄마와 다투고, 고민 끝에 결정한 보급형 〈환생〉 어플리케이션 구매마저도 취소한다. 추억 대신 돈을 선택한 자신에게 실망한 것도 잠시, 수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