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BOOK돋움]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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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BOOK돋움]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 이은진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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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인간적인 죽음을 위하여  

유성이 지음, 멘토프레스 펴냄


이 책의 저자 유성이는 2007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16년 이상 ‘죽음학’을 연구하며 박물관, 호스피스병원, 학교 등에서 죽음과 삶을 성찰하는 교육을 해오고 있다. 


2011년에는 아동 대상으로 ‘죽음과 삶을 생각’하는 생명교육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가족과 사별로 인한 상실의 비탄에 빠져 있는 이들의 애도 과정을 돕는 일에 종사해왔다. 또한 어머니보다 12년을 더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쓸쓸한 죽음을 지켜보며 노년의 말기 삶과 인간적 임종을 위한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2020년 11월 본격적으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2021년 1월부터 호스피스(hospice 임종이 다가온 환자를 전인적으로 돌봄) 병원에 뛰어들며 ‘간병사’로서 직접 체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저자는 말한다. “이 글은 2021년 1월 22일 호스피스병원에서 만난 88세인 어르신(도미니코)이 죽어가는 시간 속에서 생명을 지닌 한 인간으로 존재했던 22일간 이야기다. 어르신은 ‘편안하게 죽고 싶다’며 죽음을 맞이할 준비된 마음으로 입원했으며, 나는 어르신을 간병하면서 그의 행동, 생각, 감정 등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하게 보고 느낀 점을 기록했다. 


어르신은 호스피스에서 자신과 보낸 시간을 ‘훗날, 글로 써’하며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2022년 12월 2일 오후, 완성된 원고를 손에 들고 어르신의 부인을 만나면서 ‘기록을 남기길 잘했구나’ 안도했다. 무엇보다 도미니코 어르신의 부인께서 떳떳하게 ‘이 책에 담긴 내용이 네 아버지의, 네 할아버지에 관한 글이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책이 되어 정말 기쁘다.”


죽음을 앞둔 환자는 어둡고 암울하기만 할까.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에게도 생명수 같은 간병사(저자)의 행동으로 환자를 천국에 실어나르기도 한다. 매일 저녁마다 일과를 마무리하듯 얼굴과 발을 마사지해주는 저자에게 어르신은 “남에게 발마사지는 평생 처음 받아봐. 최고야! 천국이다!”하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 발로 열심히 사셨잖아요.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런 별세계가 가능할까. 이 글에는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자신을 ‘내어줌’이란 무엇인가 ‘영적 돌봄’이 무엇인가, 의문을 던지며 성찰케 한다.


어르신은 죽음 이후의 마무리 절차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가족을 믿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동안 그는 ‘황혼 일기’를 기록했는데, 의식을 잃기 전 간절한 마음으로 황혼 일기장에 “성령의 나라가 함께 하시길 비나이다”라고 썼듯이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시리라 믿는다.”


궁극에는 한 개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책은 인간적인 죽음을 맞기 위해 개인 스스로가 자기 돌봄을 하며 현실적 준비도 해야겠지만, 타인의 도움이 절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일례로 다음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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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임대 아파트에는 104세 비비안나 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85세의 골롬바 자매님이 할머니의 임종 말기 삶과 임종 과정 그리고 장례절차를 거쳐 화장과 유분 처리까지 해주었다. 임종을 맞기 전 열흘 동안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이웃 교우들이 교대로 할머니를 돌보았고, 열하루 만에 퇴원한 어르신은 이웃의 돌봄을 받으며 집에서 임종했다. 골롬바 자매님의 사랑과 책임의식이 공동체와 함께했기에 가능했다. 104세 할머니의 죽음이 바로 ‘인간적인 죽음’의 모델이지 않을까. 골롬바의 이러한 행동이 바로 자신을 선물로 내어준 사랑이라 확신한다.”


정재우(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장)는 “생의 말기를 지내는 환자를 돌보는 모습이 담긴 이 책은 ‘돌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라고 했으며 이명아(가톨릭의과대학 서울성모병원 종양내과 교수, 현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재무이사)는 “임종을 앞둔 말기 환자가 어떻게 편안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이 책은 호스피스 완화의료 시스템과 환경 구축에 귀한 자료로 쓰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 본인이 할 일은 미리 준비해둘 필요가 있다.…모든 것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본인의 태도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절대적 고독의 시간. 이 순간을 다짐해본다. 무엇으로부터 위로를 얻으며 의연하게 죽음을 마주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늘 죽음을 기억하며 삶에서 준비하고, 하루를 차곡히 살아야겠다. 인간적인 죽음으로 삶을 완성하기 위해.”


아이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사를 하여 세 모자가 ‘열두 평 아파트’ 생활을 시작하는 내용으로 포문을 여는 제1부에서는 ‘기록강박증’에 걸리게 된 사연, 1991년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을 때로 기억을 되살린다. 24시간 육아를 도맡아야 했던 당시 수첩 두 권을 마련해 누가, 몇 시에, 분유는 얼마큼 먹었는지, 변은 무슨 색인지, 시시콜콜 기록하기 시작한다. 삼십 년이 지난 수첩을 얼마 전 발견했다며 메모한 내용을 들여다본다.


쌍둥이가 다섯 살 끝 무렵, 미술교사로서 아동들을 가르칠 때도 수첩에는 물론이고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을 남겼다며 어려서 귀를 앓아 오른쪽 청력 0퍼센트인 저자는 ‘청력이 약해 말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기록은 장애를 채워주는 장치였다’고 술회한다.


육아 일기로 시작한 기록 습관은 엄마의 암투병 시절 이야기와 ‘어머니의 죽음’ 기록으로 이어진다. 역시 저자가 어머니에 대한 영상 기록, 첫 시작부터 시선을 끈다. 

 

“노트북을 열고 2006년 초부터 1년간 ‘엄마의 투병기록’을 영상으로 담은 ‘회상’ 폴더를 클릭했다. 뭔가를 응시하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 항암치료로 듬성듬성해진 엄마의 머리를 받친 베개를 연신 바로잡는 아버지, 소매를 걷어붙인 아버지의 팔뚝이 눈에 띈다. 이어 발끝에 놓인 노트북을 바라보는 엄마….”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엄마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지극한 정성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단독주택에 아버지도 살아계셨으니 집에서 충분히 돌아가시게 할 가능성이 있을텐데…. 왜 병원으로 옮겼을까?’ 의문을 품으며 병원 관계자가 엄마를 바로 영안실로 실어갔던 씁쓸한 기억을 되뇐다.


2007년 엄마의 죽음 이후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술회하며 가까이서 처음 접한 엄마의 투병과 죽음을 통해 비로소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의문을 던지며 죽음에 관련된 서적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는 것. 


급기야 엄마의 영혼은 어디로 갈지, ‘죽은 영혼의 이후’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당시 녹록지 않은 삶에서 바닥을 치고서야 진정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었고 그렇게 죽음을 인문학과 철학 그리고 영성으로 풀어내는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고, 우리나라 상례(喪禮) 문화가 전시된 박물관의 학예사로서 아동을 대상으로 죽음과 삶을 생각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이것이 죽음과 관련하여 첫 번째로 시도한 일이었으며 엄마의 죽음이 남긴 의미 있는 첫 선물로 기록된다.


어머니의 죽음 다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죽음의 기록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엄마가 죽고 12년 후에 돌아가시는데,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6개월 만인 2019년 3월에 돌아가시고 마지막 임종을 가족이 지켜볼 수 없었음을 아쉬워한다. 


엄마 돌아가시기 두 달 전부터 남동생 부부가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아버지는 늘 며느리가 “잘한다!”고 말해왔으며 어머니 죽음 이후, 그 옛날 꼬장꼬장하고 엄했던 아버지 모습은 사라지고 사소한 은행일조차 며느리에 의존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아버지의 구십 세 생신을 펜션에서 1박 2일 보낸 후, 해운대에서 마지막 성찬을 하고 헤어진 지 두 달여 만에 아버지는 새벽녘에 화장실을 기어서 가는 사태에 이르렀고, 아버지는 남동생에게 며칠만 병원에 입원시켜달라고 부탁한다.


요양병원에 가기 전날 아버지는 온종일 손님 한 명 오지 않는 가게에 기어코 나가 전깃불도 끊긴 가게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도로변으로 무수히 지나가는 사람과 자동차를 바라봤다는 것. 그날 이후, 더 이상 집에 돌아올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 있다.


저자는 요양병원에 있는 아버지의 슬픈 눈빛을 잊지 못한다. 입원할 즈음, 파킨슨병과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부친은 틀니 빠진 입에서 “집으로 가자. 나는 요양병원에서 죽기 싫다”는 말이 새어나오고 일주일 후, 다시 패혈증 때문에 다른 병실로 옮겨지며 다시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고 쓸개에 고름이 생겨 다른 병원에 옮겼다는 소식을 받는다.


결국 가족의 의견은 충분히 반영이 안 된 채 병원에서는 쓸개 옆에 고름이 찬 것을 빼냈고, 의료처치를 받은 후 아버지가 간 곳은 시내에서 떨어진 한적한 요양병원이었던 것. 시내 한복판과 달리 공기가 맑고 외곽에 위치한 요양병원이었지만, 이것이 결국 대중교통이 불편한 외곽에 있다는 점에서 매일 찾아갔던 여동생마저 새 요양병원으로 옮긴 후로는 발길이 뜸해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새 요양병원에서 있던 저자의 부친은 몸에 균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좁은 1인 격리실에 있었고 숨은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다리는 구부린 상태에서 굳어져갔다. 그나마 오른팔과 손조차 호흡기줄을 만진다는 이유로 손에는 장갑이 끼인 채 침대에 묶여 있었던 것. 체위를 자주 바꿔주지 않아 몸이 굳고 욕창이 생겼는데도 체위를 바꾸기는 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저자를 알아보지 못했고 침대에 묶인 장갑 낀 부친의 손을 꺼내서 잡자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이렇게 온기 있는 손을 만져, 아버지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고, 한편 활짝 열려 있는 창문, 이불은 젖혀 있고 환자복 바지는 밀려내려 그대로 드러난 아버지의 차가운 배, 아버지의 슬픈 눈빛을 바라보며 그 이후로 저자는 눈물 흘리며 기도한다. “하느님, 저의 아버지를 구원하여 주소서. 평안히 영면할 수 있도록 어서 불러가 주소서!”


본가에서 유일한 가톨릭 신자인 저자는 일본에서 사목(司牧)을 하는 신부님이 “아버지에게 본당 신부님이 세례를 하면 가장 좋겠지만, 사정이 안 되면 마리아가 대세(代洗 사제를 대신해서 세례를 주는 일)를 드리면 어떻겠냐”며 대세 주는 방법을 문자로 보내왔고 망설임을 접고 용기를 내서 아버지에게 대세를 주는 장면이 본문에 등장한다, 


옆에 불교 신자인 큰언니도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을 믿으세요? 영원한 생명을 믿으세요?”, “지금까지 지은 죄가 있으면 용서를 청하시겠어요?”, “나는 아버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아버지는 가장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매번 딸이 질문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저자는 그 모습을 ‘이마에 물을 조금 뿌리며 대세를 마칠 때까지 아버지는 가장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고 적고 있다.


사흘 전에 봤던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6개월 만인 2019년 3월 21일 오후 5시 22분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 순간을 아무도 지키지 못한 가운데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하였고, 엄마의 묘지 곁에 나란히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우제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고속도로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며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하늘을 보면서 ‘아버지는 인생놀이를 마치고 하느님의 사랑이 기다리는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셨구나.’ 내 안에서 평안한 따뜻함이 올라왔고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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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창

권행백 지음, 아마존의나비


한반도 남쪽 섬, 한가롭던 해변에 정부가 거대한 항구를 만들기로 결정하자 마을 사람들은 반대 운동에 나선다. 환경 보호의 명분 뒤엔 육지인들에 대한 해묵은 거부감 또한 똬리 틀고 있다.


비대위 농성 천막이 세워진 바닷가 너럭바위에 마을의 마지막 심방(무당) 고장생이 홀로 진혼굿을 벌인다. 오래전 그곳에서 떼죽음 당한 원혼들을 위로하는 의식이다. 농성장에서 지켜보는 석준은 어릴 적 굿을 따라다니던 기억을 되살리며 장생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서울에서 광고 회사에 다니던 석준은 민간인 사찰 사건에 연루되어 서른넷 나이에 실직하고 빈털터리로 귀향했다. 


석준의 형, 명준은 집 마당에 들여놓은 컨테이너 공장에서 농기구 만드는 일을 한다. 한쪽 다리를 절며 늘 남의 눈치나 보던 그가 마을 비대위원장을 자청해 활동하다 구속되기에 이른다. 석준에게 농성장은 구속된 형을 대신하여 마지못해 참석하는 자리다.


1949년생 심방 장생은 마을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람들의 병까지 고쳐 주던 어미 심방 문막례의 뒤를 잇는 마을의 마지막 심방이다. 젊은 시절 스스로의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하고 월남전 참전 후 직업 군인으로 1980년 빛고을에 파견되었다.


5월 난리통에 자신의 아이까지 배 속에 품은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좌절하던 그는 결국 세상을 등지고 귀향했다. 어미 심방을 이어 무가에 입적하지만 잃어버린 여인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고자 하는 처절한 욕망을 어미에 못 미치는 신기(神氣) 대신 묘약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 애쓴다. 마침내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보여주는 관시탕을 얻었으나 제 몸에 반복된 시험으로 끝내 건강을 잃어 정작 본인은 그 묘약의 효험을 경험할 수 없다.


석준은 베트남 출신 어린 형수 응옥이 환청과 두통에 시달리자 수감 중인 형을 대신하여 병원에 데리고 다니지만 원인 모를 병의 치료에 실패한다. 며느리의 증상이 향수병인가 싶은 어머니 부탁으로 형수 응옥을 데리고 베트남 친정에도 다녀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그러는 사이, 석준과 응옥은 서로에게 애정을 느낀다.


명준과 결혼한 지 6년이 됐지만 응옥에겐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산부인과 진단 결과 그녀에게는 이상이 없다. 그녀는 평생을 해녀로 살아 온 시어머니에게 물질을 배운다. 연로하여 더 이상 물질을 할 수 없게 된 할머니는 손자며느리의 손에 빗창을 쥐어준다. 


두통으로 실신하기에 이른 손자며느리를 보다 못한 할머니가 석준에게 고 심방을 찾아가 보라고 권한다. 응옥의 신기를 첫눈에 알아본 고 심방은 석준에게 일종의 거래를 제안한다. 형수의 병을 고쳐줄 테니 몸이 쇠락해진 자신을 대신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한 잔이면 과거로, 두 잔을 마시면 미래로 간다는 고 심방의 얘기에 호기심이 발동한 석준은 관시탕을 받아들고 과거 여행에 빠져든다. 그리고 해방 후 이어진 비극의 가족사와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제주 4․3에서 베트남전, 5월 광주를 거쳐 오늘에 이른 핏빛 한국 현대사를 헤집는 본질적 물음.


‘빗창’은 제주 잠녀(해녀)들이 ‘물질’에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바닷속 바위틈 깊숙이 파고든 소라 전복은 맨손으로 따기 힘들뿐더러 무리하게 따려 하다가는 다치거나 심지어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삶을 일구기 위해 제주 여인들이 소중이(물질할 때 입었던 옷) 허리춤에 매고 바닷물 속을 누볐던 빗창은 밭일에 쓰던 골갱이(호미)와 더불어 삶의 질곡을 표상하는 도구였을 뿐 아니라 권력에 맞섰던 저항의 도구였다.


전태일문학상 수상작 <악어> 등 이미 발표한 작품에 드러나듯, 작가는 실용주의와 신자유주의적 파고에 이념과 서사가 꺾인 시대에도 끊임없이 굴곡진 우리 현대사에 천착해 왔다. 우직하리만치 역사의 고갱이를 부여잡고 민초들의 삶의 현장을 발로 누빈 끝에 마침내 제주 4‧3에서 오늘 우리 삶을 규정하는 본질적 질문을 끌어냈다.


“성님, 그놈덜이 누구 편이꽈? 우리 편 마씸? 경허민 그 ‘우리’는 대체 누구꽈? 날만 새민 우리 제주 사롬덜 싹 쓸어다 죽이는데 그놈덜이 어떵 우리영 혼패란 말이꽈!”


해방 후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이념의 균열을 파고들어 강자를 등에 업고 변신에 성공한 리바이어던은 자신들만의 공고한 카르텔 구축에 성공했다. 한 끼니에 삶을 걸어야 했던 인민들이 고대했던 새로운 세상은 없었다. 


한 가마 쌀의 무게에도 미치지 못할 권력의 욕망이 곳곳에서 처참한 억압으로 드러나고,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자 했던 공동체적 삶은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제주에서 시작된 핏빛 저항의 현장은 여수 순천으로, 이 나라 청춘들의 고통스런 희생을 담보로 국경 넘어 베트남 인민의 피까지 머금더니 다시 이 땅 광주의 5월로 이어졌다. 

 

한때 ‘명의’ 소리까지 들으며 편안하게 안주할 수도 있었던 한의사의 길을 내려 놓고 실존적 인간의 행복을 찾아 나선 작가다. 그러니 통한의 세월을 거슬러 왜곡된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적 실존을 규정하는 근원적 질문이 소설로 드러난 건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거대 담론이 사라진 자리에 정치적 허무주의와 실용주의적 욕망이 들어앉은 시대이지만, 역사는 반복되고 나락에서도 희망은 언제건 공기처럼 스며들므로 인간적 삶에 대한 작가의 근원적 의문이 이 소설을 통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