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BOOK돋움] 세월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결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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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BOOK돋움] 세월이 지나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결정체

  • 손유지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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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부 - 소금이 빚어낸 시대의 사랑

박이선 지음, 다산책방 펴냄

 

선운사의 스님 염봉은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일본인 여성 코코네와 마주한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 어머니의 자취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는 그녀를 염봉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소설의 태엽은 일제강점기를 향해 감겨 들어간다. ‘종일토록 물을 져 나르고 불을 때서 소금을 만드는 전통 염전’의 염부(鹽夫)는 뙤약볕과 소금물에 절어 밤새 불을 지펴야 하는 고된 직업이었다. 

 

주인공 염길은 그 염부의 아들로, 고창고보(고창중학교)에 다니는 수재다. 염길은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읍내 여관을 운영하는 일본인 사장 료스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료스케의 큰딸인 아케미와 처음 만난다. 

 

그러나 인연을 길게 이어갈 수는 없었다. 주권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먹고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시대였다. 진로를 고민하던 끝에 염길은 교사가 되어 고창을 떠난다. 더욱 강화된 황국신민화 교육 아래, 천왕 사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학생들을 검열해야 하는 굴욕과 설움의 날들이 계속됐다.

 

전주를 찾은 염길이 마찬가지로 교사가 된 아케미와 우연히 마주치며 분절됐던 인연은 다시 생동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에게 서서히 찾아드는 사랑이라는 감각은 불투명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색채를 띠었다. 그 앞에서 시대나 출신 같은 거대한 문제는 잠시나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그러나 염길이 반일 운동에 동조했다는 의심을 받아 구속되고, 곧이어 해방을 맞자 조선에 살기 어려워진 아케미는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염길의 본가에서 구워낸 소금이 담긴 단지와 함께였다.


이 책은 대중적인 사랑의 문법을 따르면서, 일제강점기부터 미군정 때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세심하게 담아냈다. 

 

소금 생산노동자의 고달픈 생애, 당시 청년들의 민족애와 진로 문제, 고창의 교육사, 해방 무렵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행방과 당시 치러지고 있던 국가시험의 난항, 정치 세력 간의 충돌, 여순 사건 등 당시의 혼란을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시대는 개개인을 배려하며 기다려주지 않았다. 대다수의 평범한 서민들이 그러했듯,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 염길은 스님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현재. 염봉이 된 염길 앞에 코코네가 서 있다. 어머니의 소금을 따라 이곳에 왔다는 코코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염봉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아주 오래 머문다. 

 

아버지의 염전은 동생 대길이 지키고 있다. 바닷가에서 소금 끓일 준비를 하며 대길은 언젠가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우리 염부들이 배운 그대로만 하믄 절대 소금은 변하지 않을 것인께 허튼 생각 말고 맘속에 똑똑히 새겨야 써.” 

 

모든 퍼즐이 맞추어지고, 끊어졌던 선이 다시 이어져 형태를 갖춘 실체가 된다. 다른 모든 것이 변해도 소금만은, 어디에 있든 그 귀한 맛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 말 그대로였다. 소금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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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희영, 필희, 은정은 경상남도 시골 마을 은수리의 삼총사로 불리는 동갑내기다. 그러던 어느 날 희영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꽉 막혀서 우글우글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필희와 저수지에 올라가게 되고, 그곳에서 새까만 구멍 하나를 발견한다. 

 

블랙홀처럼 무엇이든 던지는 족족 가루로 만들어 빨아들이는 구멍과 그 구멍을 아주 유심히 쳐다보는 필희. 그리고 다음 날 필희가 사라진다. 소설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르고 희영에게 하얀 종이 위에 ‘블랙홀’ 세 글자가 적힌 의문의 편지가 도착하며 불안과 긴장, 상실과 애도의 서사가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희영을 중심으로 병렬적으로 얽히고설킨 미정, 순옥, 필성, 정식, 찬영, 혜윤의 이야기 또한 세밀하게 설계된 구조적 서사에 아름답게 감응한다. 작가는 무언가를 잃고, 방황하고, 사라지고 싶어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은수리에서 발견된 미확인 홀 위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다. 

 

그렇게 우리 삶에 실재하는 커다란 ‘홀’ 또한 만들어내는데, 인생에 한 번쯤 겪는 깊은 수렁에 빠진 느낌, 선택을 박탈당한 느낌, 김혜진 소설가의 말처럼 “막막하게 느껴지는 생의 진실”이 그것이다. 작가가 “삶에 단단히 박음질된 사람이 아닌 대롱대롱 매달린 단추처럼 위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쓴 이 책은 그 공허한 삶의 애환과 공명하며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소설 속 인물은 모두 상실의 쳇바퀴 안에서 살아간다. 이 지지부진한 상실은 다른 층위로 각별하게 이야기된다.


사라진 필희와 필성의 엄마 순옥은 어린 두 딸을 버리고 은수리를 떠나 대구에 정착한다. 세월이 흐른 뒤 순옥은 친손녀 같은 이든이 수학여행비를 모으고 있다는 말에 자신의 슈퍼에서 아르바이트할 것을 제안하고, 어느 날 이든이 몰래 담배와 오백 원짜리들을 빼돌려 화단에 묻어두는 장면을 목격한다. 

 

빠르게 찾아온 서러움과 배신감에 이든을 내치려던 순옥은 화단에 묻힌 동전들을 세어보고는 사춘기 소녀 이든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마음먹는다. 너무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로, 함부로 잃지 않기로.

 

순옥을 비롯해 이미 상실의 아픔이 한밑천인 소설 속 인물들은 이렇듯 중요한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기분을 “앞당겨 느낀 불안”으로, 버리고 버려질 것만 같은 상황을 “지레짐작”으로 감각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럼으로써 상실을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그들의 몸짓은 살아가며 잃게 되는 수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모든 게 과연 일순 잃게 된 것일까도 함께 골몰하도록 한다. 어쩌면 무언가를 잃게 될 것 같은 기우에 등 떠밀려 함부로 손을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너무 쉽게 서러워하지는 않았을까를 곱씹어 본다. 그러므로 더는 잃지 않겠다는 의지, “어떤 것을 완전히 잃기까지는 여러 단계가 있다”라는 순옥의 말이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한 위로인지도.


개인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삶은 단단하게 응축된 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잔뜩 부푼 공처럼 제멋대로인 인생에 걷어차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굴러다닌다. 그러나 책은 그 긴장 안에 머물지 않는다. 각 인물이 가진 아픔의 초점을 바깥으로 맞추며 조금씩 천천히 문제를 이완시킨다.


책을 읽다 보면, 이해 없이 그냥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아픔도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이내 “커다란 감동과 위로로” 바뀌어 우리 삶 한쪽에 자리 잡은 불분명한 공동(空洞)을 채워주리라는 것을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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