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산책] 강렬하고 당당한 초가집.. 임창복 '필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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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산책] 강렬하고 당당한 초가집.. 임창복 '필경사'

  • 손유지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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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 ‘건축가 심훈’의 꿈을 담은 집 

임창복 지음, 효형출판 펴냄


'주택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과 형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사회와 문화 전반의 흐름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당대 건축가들의 주장 역시 매우 복합적인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

 

모더니스트 예술가, 작가이자 영화인 심훈(1901-1936)은 문학 작품과 영화 말고 다른 유산도 남겼으니, 바로 초가집 ‘필경사’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읽어 봤을 <상록수>가 태어난 곳. 심훈과 <상록수>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우리에게 각인돼 있지만, <상록수>의 산실 ‘필경사’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필경사가 어느 절(사찰)이냐고 묻는 이도 있을 정도다.


이 책은 작가 심훈의 건축가적인 면모를 조명하고, <상록수>를 비롯한 1930년대 건축 사료를 바탕으로 필경사의 자취를 추적한다. 평생 ‘한국의 주택’을 연구한 건축가 임창복 교수가 5년을 바쳐 쓴 역작이다.


경성의 언론인 심훈은 1932년, 모든 활동을 접고 당진으로 내려간다. 그는 먼저 당진에 내려가 있던 장조카 심재영의 집에 머무른다. 심재영은 낙후한 농촌 발전에 힘쓰던 청년으로, <상록수>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모델이다. 저자는 심훈이 먼저 당진에 내려와 집을 지었던 심재영에게 젊고 경험 있는 목수 ‘석돌이’를 추천받아 필경사를 지었다고 본다.


“집들은 엄부렁하게 지어놨지만, 인제 내용이 그만큼 충실하게 돼야 해요!” <상록수>에서 ‘청석골 학원’의 낙성식(落成式)을 앞두고 박동혁이 채영신에게 하는 말이다. <상록수>는 집 짓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영신은 신식 목수를 찾아가 ‘서랍 속에서 여러 가지로 그려본 설계도’를 꺼내 펼친다. 동혁은 ‘초승달이 명색만 떴다가 구름 속으로 잠기던 음력 칠월’, 농우회 회원들과 함께 ‘여러 해 별러오던 회관을 지으려고’ 땅을 다진다. 심훈이 ‘도면 볼 줄 아는’ 목수를 구해, 1934년 초여름에 필경사를 지었으리라 유추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는 필경사에 어떤 꿈과 의미를 담았을까.


저자는 심훈이 필경사를 짓게 된 경위를 여러 측면에서 분석한다. ‘하얀 손의 인텔리’ 심훈에게 집 짓는 일은 곧바로 착수할 만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개벽>, <신생활> 등 언론매체를 통해 변화의 흐름을 충분히 파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편리하고 합리적인, 근대적 생활 방식인 ‘문화생활’을 영위하고자 ‘문화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뾰족지붕’에 ‘와네쓰’ 기름을 바른 화려한 양옥 문화주택이 유행하던 중에도, 심훈은 농민의 삶을 담을 ‘농촌형’ 문화주택을 고심했다. 집이라면 응당 ‘대문’을 세우고 ‘담’을 두르던 시절, 과감히 생략하고 현관을 전면에 내세웠다. 중정식(中庭式) 홑집 양식을 버리고 집중식 방갈로형 겹집을 지어 가족 중심의 ‘생활실’까지 마련했다.


문인 이태준의 수연산방(壽硯山房), 건축가 박길룡의 소주택과 비교하면 필경사에 담긴 뜻은 더 뚜렷이 드러난다. 수연산방은 대궐 짓던 목수를 불러다 도급(都給)도 아니고 ‘일급(日給)’을 주며 지은 집이다. 박길룡은 ‘생활의 과학화’를 주장했던 조선 건축의 선구자로, 조선총독부 최고 기술자인 ‘기사(技師)’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당대 최고 부호들을 위한 혁신적인 주택들을 설계했다. 이들과 비교해도 필경사는 공간 구조와 편리성 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


이 책은 저자가 필경사를 여러 차례 답사하며 찍은 풍부한 사진들과 함께 1930년대 중반의 새로운 생활 공간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심훈은 ‘농민의 삶을 담을 과학적이고 실용적이며 사회적 가치까지 지닌 집’을 구상해 필경사를 완성했다. 저자는 우리에게 그가 종합예술가를 뛰어넘어 ‘건축가’적 면모까지 지니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초가집’은 전근대적이고 낡은, 낙후된 환경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라는 노랫말이 있었을 정도. 그러나 충남 당진 심훈기념관 옆에 자리한 초가집 ‘필경사’는 가난하고 낙후된 주거 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강렬하고 당당한 인상을 준다.


책은 작가 심훈의 집 ‘필경사’를 건축적으로 분석한다. ‘필경사’와 연관지어 심훈의 정신, 당대 건축 사조까지 찬찬히 살펴본다. 저자는 심훈을 ‘모더니스트 예술가’라 칭하는 논문들을 인용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에게는 건축가적 면모도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정면 5칸, 측면 2칸. 총 10칸 규모로 지어진 필경사는 한 칸당 가로세로 2.5미터의 모듈로 이뤄진 총 62.5제곱미터, 약 20평짜리 집이다. 소박한 규모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을 살펴보면 과학적이고 모던한 감각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초가지붕인데 정면에는 격자무늬 유리창이 보이고, 서재와 생활실의 입식·좌식 생활 방식에 따라 창의 높이가 각각 다르다.


브나로드 운동과 주택개량 운동이 한창이던 1930년대, 건축가와 지식인들은 안채와 분리돼 있던 화장실을 집 안으로 들이고 부엌은 집 후면으로 보내는 등 편리한 생활 공간을 구상했다. 그 흐름을 인지하고 있었던 듯, 심훈은 필경사 화장실을 실내로 편입시키고 부엌은 집 뒤쪽에 계획했다. 그러면서도 경성의 문화주택과 달리 창고까지 둬 ‘농가’로서의 성격을 확고히 했다.


밖으로 나와 필경사를 사방에서 둘러보면 그 디자인에 두 번 놀란다. 정면에는 현관과 화대가 있고, 양 측면으로는 당시 한반도에서 보기 힘들었던 ‘수평창’과 ‘벽체 중앙에 몰린 창’이 있다. 창 내기 수법만으로도 당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획기적인 집이었음을 한눈에 알게 된다.


필경사는 심훈의 꿈을 담은 ‘이상적이고 새로운 신주택’이자 ‘농촌형 문화주택’이다. 일제 식민 치하, 자본주의 도시의 착취로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던 농촌의 계몽과 자주 국가로의 발전까지 꿈꾸던 그의 정신은 필경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날’을 꿈꾸던 그의 집은, 끝끝내 도래한 ‘그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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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눈사람 

최승호 지음, 이지희 그림, 상상 펴냄

 

'믿고 싶지 않겠지만 나 아닌 것들이 모여서 나를 잠시 이루었다 해체되듯이, 당신도 당신 아닌 세계로 흘러드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슬, 바람, 흙, 별, 그것들이 본래 당신의 얼굴 아니었나.'

 

이 책은 공허와 비애, 우울과 불안, 고독과 절망에 대한 이야기다. 그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엄습해 오는 고통과 좌절을 고독으로 버틴 시인을 만난다. 그는 어둡고 깊은 슬픔과 절망을 견디면서 무심하게, 때로는 조소하며, 그러나 정직하게 고독을 마주하려 안간힘을 쓴다. 

 

시인의 노력은 어떤 순간에도 경쟁과 불안의 도가니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린, 바늘 하나 들어올 틈도 없는 단단한 에고를 가진 우리. 어린 아이 같이 순수하고, 때로는 냉정한 시인의 상상 덕분에 광막한 우주 속에 놓인 우리의 고독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책은 최승호 시인이 생애를 통해 견딘 어둡고 깊은 절망과 고통에 대한 기록이다. 시인은 염세조차 받아들이고, 어떤 거짓된 위로도 거부하며 허공과 암흑의 끝을 응시한다. 그의 이야기는 단단한 에고에 대한 담담한 타격이며,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독자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따뜻한 노력이기도 하다.

 

빙하기의 눈사람은 얼어붙은 대도시의 적막과 어둠과 절망과 고독에 직면한다. 빙하기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눈사람은 슬픔, 절망, 고독, 적막, 욕망, 괴물, 유령, 공포, 불안, 허공, 조소를 거쳐 마침내 우주가 된다. 짧고 쉽게 읽히지만, 깊은 시적 함의와 현실을 교란하는 우화의 전복을 담지한 철학적이고 기묘한 이야기다.

 

책은 눈사람이 절망하는 그로테스크한 동화로, 자신의 몸이 얼어붙는 듯한 은유로, 깊은 슬픔과 고통의 기록으로, 문명의 폭력에 죽어 가는 생태의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철저히 혼자라는 것을 함께 느껴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그 안에 있다.

 

아름다움은 눈사람이 어떤 거짓된 위로도 거부하며 고독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데 있다. 일상에서 우울과 절망, 고통은 무시로 우리를 덮친다. 우리는 속수무책 당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버텨 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지 못한다. 어떻게 버틸 것인가. 시인은 이러한 버팀의 자세를 우리에게 펼쳐놓는다.


책은 고독이 소외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님을 일깨워 준다. 시인의 고독은 절망과 우울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우주의 일부라고 느끼게 한다. 우주의 타자들과 자신을 동등하게 바라보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문명과 생태에 관한 시인의 질타를 듣는다. 에고로 가득 찬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세계를 감각하며 지구와 생태를 인식하게 된다. 

 

해설에 따르면 최승호는 환경 위기의 원인으로 인간 중심의 자연 지배적 세계관을 지적하며 인간 우월주의를 비판하는 생태주의를 시의 화두로 붙잡고 궁구해온 시인이다. 대도시를 '괴물'로 비유하고 '문어'로 문명을 조소하며 '낡은 외투', '문자, '낮', '우주', '지구, '망막', '안구', '시선', '눈', '백지', '물소', '도살장의 소', '배 터져죽은 두꺼비' 등이 모두 동등한 존재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우리가 외면하고자 했던 그들의 죽음을 눈앞에 가져다 놓으며 에고를 담담하게 타격한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참에도 슬퍼하거나 반성하지 않는 문명을 어떤 빙하보다도 차갑게 질타하는 것이다.

 

책은 그로테스크한 우화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로테스크’는 15세기 말 이탈리아 곳곳의 동굴에서 발굴된 특이한 고대 장식에서 유래된 말로, 식물과 동물, 식물과 인간, 동물과 인간 등 이질적인 요소들의 혼재를 특징으로 한다. 그로테스크의 미학은 현실의 질서가 파괴된 세계를 대면하는 긴장감과 섬뜩함에 있는 것이다. 

 

'망둥어', '갈매기', '게', '낙지'가 사람처럼 죽어 가고, '눈사람', '마네킹', '가방'이 사람처럼 보고 느끼고 조소하고 성찰하는 시인의 그로테스크적 상상력은 강렬하다. 그로테스크한 우화들은 이질감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죽음을 느끼게 한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죽음은 우리의 에고에 균열을 내며, 삶은 이전과 다른 것이 된다. 인간 역시 많은 것들과 함께 사라지거나 죽어 가는 존재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은 더 알게 된다. 마침내 우리는 빙하기와 같은 삶을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