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산책]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피어나는 생명..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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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산책]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피어나는 생명..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 손유지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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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지음, 다산책방 펴냄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살해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가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남해의 미항 통영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김봉제는 지역의 유지다. 터울이 나는 동생 김봉룡은 첫 번째 부인을 때려 죽였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광폭한 성정으로, 아름다운 둘째 부인 숙정과의 사이에서 아들 성수를 두었다. 

 

어느 날 숙정을 사모하던 욱이 도령이 통영에 들어서고, 아내의 부정을 의심한 봉룡은 살인을 저지르고 달아난다. 숙정은 오해에 맞서 비상을 먹고 자결한다. 성수는 김봉제와 그의 부인 송씨의 손에 자라고, 약국을 물려받아 집안의 유지를 이어 나간다. 

 

한실댁과 혼인한 성수(김약국)는 딸 다섯을 둔다. 샘이 많은 큰딸 용숙은 과부로, 통영을 뒤집어놓는 스캔들에 휘말리지만 재물을 향한 남다른 감각으로 부를 축적한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둘째 딸 용빈은 자매 중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다. 셋째 딸 용란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이성보다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머슴과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 아편쟁이에게 떠밀리듯 시집을 간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머슴과 달아나며, 김약국댁을 완전한 몰락으로 이끄는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넷째 용옥은 손끝이 야문 신실한 기독교 신자로, 가장 가까이에서 집안의 비극을 목도한다. 

 

집안의 어장 사업을 도맡던 청년 서기두와 혼인하지만 애정 없는 결혼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막내 용혜는 할아버지 봉룡의 노란 머리칼을 닮은 딸로, 김약국이 아끼며 사랑한다.

 

김약국은 물려받은 유산으로 풍족하게 살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뒤떨어진 감각으로 재산을 탕진하며 역사의 뒤편으로 떠밀린다. 이에 반해 영민한 둘째 딸 용빈은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다른 자매처럼 결혼하지 않았고, 신식 교육을 받았으며,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 돈을 번다. 

 

그렇기에 전통적인 규율에 얽매어 비극적 결말을 맞는 집안 식구들과 달리,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폐허로 남은 과거를 뒤로 하고 서울로 떠나는 용빈과 용혜를 통해, 무수한 비극을 극복하는 것은 새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의지임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피어나는 생명, 그것이 박경리의 작품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치이자 힘이다. 

 

이 책은 박경리의 또 다른 걸작이다. 이 작품은 1962년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펴내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 후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며 전 국민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됐다.

 

박경리의 문학 세계를 <토지>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이들도 많지만 작가의 이름을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 건 바로 이 작품이다. 선연하게 대비되는 비극과 생의 이미지, 형형하게 빛나는 문장과 날카롭게 벼려진 인물 묘사, 맛깔 나는 경남 방언은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훌훌 넘기게 한다.

 

압도적인 이야기의 재미만으로도 다시 읽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지만,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세세한 묘사와, 유교적인 가치에 얽매어 연기처럼 허망한 운명을 맞이하는 구세대, 세속적인 욕망과 전통의 굴레에서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분투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격변하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요동치며 살아가는 인물들,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 속에서도 지지 않는 생명력, <토지>로 이어지는 박경리 문학의 원형이 <김약국의 딸들>에 담겨 있다.

 

이번 특별판에서는 국립국어원의 맞춤법 규정을 따라 현대의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다듬으면서도, 작가의 고유한 표현과 방언, 시대를 드러내는 단어 등은 그대로 두어 원작의 생동감을 살렸다. 대신 이해가 어려운 단어들은 어휘 풀이를 따로 실었고, 등장인물 소개를 통해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와 인물 간의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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