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산책] 고통에 관한 오랜 탐구.. 정보라 '고통에 관하여'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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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산책] 고통에 관한 오랜 탐구.. 정보라 '고통에 관하여' 外

  • 손유지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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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다산책방

 

'NSTRA–14의 등장으로 인해 고통의 개념은 신체적인 감각에 중점을 둔 통증의 범위로 축소되었다. 사회적・문화적・철학적・정신적 의미의 고통에 대한 질문은 점차 사라졌다. 고통은 의학적인 문제였고, 의학은 과학기술과 함께 발전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고통은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거나 다른 방식의 시술 혹은 치료를 통해 해결해야 하며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고통은 견디는 것이 아니었다. 견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신병의 징후로 의심되었다.'

 

미치고 거친, 세계의 기괴한 일면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읽는 이에게 뒤틀린 이야기의 쾌감을 전했던 전작과는 달리, 신작 <고통에 관하여>는 처연하고 서늘하다. 그리고 묘한 온기가 있다. 


아마도 이런 간극은 이 소설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맞닿아 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어딘가 잘못된 세상, 그곳을 만든 사람들에게 끔찍하고 아름다운 복수를 선사하던 정보라의 소설은 이제, 거칠고 미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 이야기한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복기하며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멈추고,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가자고. 세상과 싸우며 전복을 꿈꾼 사람의 결기가 녹아 있는 이 소설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기쁨도, 환희도, 초월도, 아마 구원조차도,인간이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모두 고통이었다.’ 제약회사 폭발 테러의 범인 ‘태’, 테러로 부모님을 잃은 피해자 ‘경’, 살아남기 위해 교단에 충성하는 ‘한’, 고통의 근원을 끝없이 탐구하는 ‘엽’.


중독성이 없고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진통제의 등장. NSTRA-14가 보편적인 진통제가 되자, 고통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지자, 오히려 고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신흥 종교 '교단'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며, 제약회사를 테러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테러 사건 후, 잠잠해진 교단에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온몸이 고문 흔적으로 가득하고, 체내에서 다량의 약물이 검출된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교단의 지도자들이다. 형사들은 진범을 밝히기 위해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어 있던 테러 사건의 범인 ‘태’를 세상으로 불러들인다.


‘태’의 기억은 교단에서 시작된다. ‘태’는 형인 ‘한’과 교단의 시설에서 자랐다. 고통을 섬기며, 고통의 무게를 모든 사람들에게 지우려 했던 ‘태’의 신념은 무고한 피해자를 낳았을 뿐이다. 제약회사를 경영한 ‘경’의 부모도 이때 목숨을 잃었다. 


‘태’의 도움으로 형사들은 교단에서 떨어져 나와 은거 중인 ‘한’을 붙잡지만, 어떤 진실도 밝히지 못한 채로 풀어준다. 호수 근처, 제약회사가 철수하며 사람이 모두 떠나 폐촌이 된 황무지를 조사하던 형사들은 그곳에서 불법 약물 제조 시설과, 유치장에서 풀려난 뒤 숨어 있던 ‘한’을 발견한다. 


‘한’은 자신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태’도 형은 범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만 무수한 증거가 ‘한’을 범인이라고 가리킨다. 한은 다시 유치장에 갇힌다.


토네이도가 들이닥친다며 기후 경보가 울리던 때, 또다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유치장에 갇혀 있던 ‘한’이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CCTV는 고작 3분 동안 작동을 멈췄고, 그 3분을 전후로 유치장에 드나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서에 설치된 CCTV를 모조리 뒤지며 조사해 보아도 모든 사람의 알리바이는 완벽하다. 단 한 명, ‘태’의 담당 정신과 의사 ‘엽’을 빼고. 형사들은 CCTV를 돌려 거기 찍힌 의사를 찾으려 하지만, 그 순간 불어닥친 토네이도에 경찰서 건물이 정전된다. 


한참이 지나 토네이도가 물러가고,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의사는 어디에도 없다. 유치장에 혼자 남겨진 ‘태’는 그를 떠올린다. 테러에 관한 질문, 교단을 향한 냉철한 태도, 고통에 관한 특별한 통찰력…. ‘태와’ 그를 둘러싼 ‘고통’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던 ‘엽.’ 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교단과 제약회사의 싸움에서 그는 무얼 얻고자 했던 것일까.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의 것이었다.‘


고통의 패러다임을 바꾼 강력한 진통제의 등장이라는 설정에도, 등장인물들이 살면서 마주해야 했던 갖가지 고통은 일상의 우리에게도 몹시 익숙하다. 몸과 정신을 혹독한 환경에 놓아두면서까지 더 나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는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들인 고통의 시간들을 ‘삶의 의미’라 부르며 견디고, 버티고, 참아내 왔다. 이런 ‘정상성’의 비틀린 부분을 매섭게 포착해 온 정보라 작가는 고통의 의미를 의학적, 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분해하고 재조립해 마침내 하나의 결론으로 내보인다. 


몸과 마음에 지독하게 새겨진 고통의 기억, 그 순간들은 과거에 내려놓자고. 우리가 내딛지 못했던 미래로 이제 한 걸음 나아가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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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안보윤 외 6인 지음, 북다 펴냄

 

'처음엔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연수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작은 현판이 붙은 교실을 떠올릴 때마다 구토와 어지럼증이 솟는다는 걸,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진다는 걸, 교탁 앞에 서면 시야가 급격히 졸아들면서 머릿속에 암흑이 찾아온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수가 아무리 애를 써도 들키는 것이 있었다. '

 

대상 수상작 안보윤의 <애도의 방식>은 학교폭력 가해자의 사망 이후 남겨진 피해자와 그 유족의 각각의 애도의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이 일하는 ‘미도파’라는 찻집은 늘 소란 속에 있지만 소란스러워지지 않는 최적의 공간이자, 그곳은 폐건물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은 승규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유일한 목격자인 나가 모든 의심 어린 질문에 응답하지 않기 위해 도달한 침묵과 멈춤의 공간이다. 


미도파라는 공간 안에서 나는 옥상 끝에 서 있던 그날의 순간으로 끝없이 회귀해 다른 결말의 가능성을 상상해보며 결코 완료될 수 없는 윤리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으로, 승규의 엄마는 미도파에서 일하는 나를 찾아와 으깨진 함박스테이크를 한 번 더 으깨놓는 것으로, 각자 자신만의 애도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처럼 <애도의 방식>은 지금까지 학교폭력을 다룬 보통의 서사(사적인 사연이나 복수의 서사)와 달리 폭력의 굴레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요된 질문에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고자 노력한 소설이다. 


그럼으로 이 소설이 가진 진정한 가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진지한 삶의 태도를 묻고 답할 수 있는 멈춤의 순간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보라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우붓이라는 이국적 장소에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취향의 우월성을 유지하려는 주인공 나의 심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취향의 계급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 시대 고급문화에 대한 허영과 자존감 사이에 놓인 개인 심리의 미묘한 저울질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김병운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성적 소수자인 진무 삼촌의 생존 사실을 알고서 그를 만나러 가는 주인공과 친구 장희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퀴어 서사에 대한 관성적인 이야기 문법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세대의 퀴어로서의 삶을 새롭게 교차하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교차성을 보여준다.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은 어느 것도 자신의 혈족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 쓰레기 호더 할머니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할머니의 집,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의 애증 섞인 시선과 신랄한 서술만으로도 독자를 압도하는 강렬한 작품이다. 


사회적인 시선에서 가치 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할머니의 욕망과, 상속이라는 이름의 부의 대물림 혹은 끈질기게 무언가를 영속하길 바라는 손녀의 욕망 사이의 치명적인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신주희의 <작은 방주들>은 암호화폐 전자지갑 회사인 더 코인 아크에서 방주를 뜻하는 아크(ark)의 홍보를 맡았던 친구 진주가 실종되고, 주인공 나 역시 갑자기 무보직 대기 발령을 받으면서 사회로부터 실족하게 되는 이야기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리 시대의 개인이 꿈꾸는 저마다의 방주라는 미약한 구원의 형태와 그 (불)가능성을 탐문해나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지혜의 <북명 너머에서>는 가장 클래식한 단편소설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이 북명백화점에서 일했던 시절을 반추하며, 그때의 애틋함의 기억을 복원해나가는 서술이 시대적인 분위기와 당대의 장소성과 맞물려 더욱 매력적으로 읽힌다. 


마지막으로 2022년 제23회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김멜라의 자선작 <이응 이응>도 함께 실려 있다. 혼자서도 성적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기계인 이응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실제적인 접촉 이를테면 뺨을 대거나, 포옹하거나, 반가운 마음에 상대를 안아서 들어 올리는을 느끼고 싶은 주인공 나는 우리의(we)의 포옹이란 뜻의 위옹 클럽에 가입한다. 


느슨한 S자 곡선을 그리는 것처럼 겉으로는 성장을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생장하는 인간관계의 친밀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제24회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 <애도의 방식>은 물론이고, 이 책에 함께 수록된 우수작품상 수상작들은 한껏 납작해지고 왜소해진 개인의 삶의 가능성을 다시금 부풀려서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동시에, 관성에 의해 떠밀려 가는 삶의 가운데에 멈추어 서서 상상하는 순간을 발견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