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산책] 언어에 아로새겨진 일상.. 목수정 '파리에서 만난 말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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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산책] 언어에 아로새겨진 일상.. 목수정 '파리에서 만난 말들' 外

  • 손유지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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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말들 - 프랑스어가 깨우는 생의 순간과 떨림 

목수정 지음, 생각정원 펴냄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을 자신과 동떨어진 존재로, 그리고 제압해야 할 혹은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왔다. 자연을 제압해온 인간은 그 자리에 문명이란 이름의 성취를 남겨왔으나, 동시에 가파르게 계급 간의 갈등과 고통을 빚어냈다. 거리에 차가 많아질수록, 일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아파트의 층수가 높아질수록 우린 점점 더 자연에서 멀어졌다. 지금 대다수의 인류는 항상성의 가능성에 대해 까마득히 잊은 듯하다. 그러나 누구든 꼼짝없이 한 시간 정도 마주 앉아 이 단어를 마주하고 그 뜻을 새긴다면, 맨발로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차분히 응시한다면, 물기를 머금은 딱딱한 씨앗이 마침내 껍질을 뚫고 싹을 피워내듯, 생명체로서의 본질에 다가가는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20년간 파리지앵으로 살며 한국과 프랑스의 경계에서 글을 써온 저자가 세밀하게 묘사한, 자유·평등·박애의 가치에 닻을 내리고 한국과 다른 논리로 굴러가는 프랑스 사회와 일상은 거울처럼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왔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두드렸던 프랑스어 34개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파리에서 만난 말들>로 독자 곁에 찾아왔다. 작가는 왜 ‘말’에 주목했을까? 그는 “말은 각각의 공동체가 경험과 성찰을 통해 빚어낸 열매”로, 그 씨 속에는 공동체의 응집된 지혜와 경험,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일상을 풍요롭게 살아가게 하는 태도부터 ‘혁명의 나라’를 이끌어온 끈끈한 공동체 정신까지, 프랑스어 34개가 펼치는 ‘말들의 풍경’을 통해 프랑스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작가가 말을 통해 발견한 프랑스적 가치의 중심에는 ‘홀로 그리고 함께’ 정신이 있다. 68혁명을 거치며 과거 거대 이데올로기가 보듬지 못했던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터져 나왔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단단한 개인주의의 토대가 됐다. 


이처럼 개인을 중시하는 태도는 프랑스인들이 자주 말하는 envie(앙비: 욕망)라는 단어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프랑스인들은 개인의 ‘앙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데, 관습·예절·상식보다 개인의 욕망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테면 ‘앙비가 없다’는 말은 모든 권유를 차단하는 프랑스식 표현이다. 반면 ‘앙비가 있다’고 말하며 행동하는 사람은 말려서도, 말릴 수도 없는 의지를 품었다고 여긴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과 타인의 욕망을 표현하며 존중하는데, 저자는 이를 ‘사소하고 경이로운 프랑스식 사치’로 명명한다.


이렇듯 개인주의에 단단히 뿌리 내렸지만, 1789년 시민혁명의 후손답게 모두의 권리를 위해 연대할 때는 너나없이 발 벗고 나선다. 


이를테면 책에서 언급하는 ‘greve generale(그레브 제네랄: 총파업)’은 1936년 첫 유급휴가 시대를 연 이래 프랑스 공동체를 굳건히 지켜왔던 말이다. 총파업이 시작되면, greve generale에서 g를 뺀 reve generale, 우리말로 ‘모두의 꿈’이란 말이 거리 곳곳에 포스터로 나부낀다. 


‘총파업’을 ‘모두의 꿈’으로 바꿔놓는 프랑스식 농담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끈끈한 사회적 유산이다. 이외에도 좌우파 상관없이 자주 쓰는 단어 solidarite(솔리다리테: 연대)에서는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는 프랑스 정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개인주의를 고수하면서도 필요할 때 함께 뭉치는 프랑스적 삶의 태도는 일견 서로 상충하는 듯하면서도, 개인과 공동체를 모두 존중하는 그들만의 지혜이기도 하다.


<달콤한 인생을 주문하는 말〉에서는 ‘견디는’ 생존(survivre, 쉬르비브르)을 넘어 ‘누리는’ 삶(vivre, 살다)을 추구하는 프랑스인들의 일상을 프랑스어 14개를 통해 들여다본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의 ‘빨리빨리’ 문화와는 반대로 프랑스에선 doucement(두스망: 부드럽게)이란 단어를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며 ‘천천히, 부드럽게’ 살아가는 태도를 지향한다. 태어날 때부터 이 말의 세례를 받고 자랐기에 그들은 “5분 늦을지언정 뛰지 않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서른 해 동안 한국에 살면서 ‘빨리빨리’에 익숙했던 그가, 파리로 이주해 두스망 문화에 젖어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Apero(아페로: 식전주)-일상의 천국을 여는 세 음절〉 장에서는 프랑스의 아페로 문화를 깊이 살핀다. 아페로는 흔히 ‘식전주’로 해석되는데, 아페로를 규정하는 주요 요소는 술의 종류와 상관없이 그것을 마시는 시간의 흥겨움·즉흥성·가벼움이다. 


너그럽게 여유를 부리며 함께 농담을 즐기는 아페로 시간으로 프랑스인들은 하루 동안 쌓인 긴장을 이완한다. 저자는 “아페로를 즐기는 순간, 우린 살아가려 애쓰는 처절한 생존 기계가 아니라, 삶을 즐기는 유쾌한 존재들이란 사실을 서로에게 일깨운다”라고 말한다. 


아페로에 곁들여지는 안주 사전이 나올 만큼 프랑스인들은 아페로에 각별하고, 이는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찬미하는 프랑스적 감각을 나타내는 말도 있다. 바로 ‘Il fait beau(일 페 보: 아름다운 날씨로군요)’. 프랑스인들은 형용사 beau(보: 아름답다)를 일상에서 경탄을 느낀 대상을 향해 아낌없이 표현한다. 잘 차려진 음식을 보고 “맛있겠다”가 아니라 “아름답다”를 연발하고, 축구 중계 중에 적시에 터진 멋있는 골에 대해 캐스터들은 “C’etait vraiment beau(이건 정말 아름다운 골입니다)”라고 탄성을 내지른다. 


삶의 마디마다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그들의 습관은 프랑스 사회의 발달한 미의식의 바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외에도 scrupule(스크뤼퓔: 세심함), bonjour(봉주르: 안녕하세요) 등 일상을 더욱 달콤하고 부드럽게 풀어주는 단어들로 프랑스적 일상의 다양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2부 〈생각을 조각하는 말〉에서는 프랑스어 11개를 다루면서 ‘공화국’을 완성한 프랑스적 가치와,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정치적 차이에 대해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먼저 〈laicite(라이시테: 정교분리 원칙)-공화국을 완성한 네 번째 가치〉 장에서는 오늘날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인 ‘정교분리 원칙’을 탐구한다. 1905년의 ‘정교분리법’이 의회에서 어떻게 통과됐는지,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사건’이었는지 알려주면서 정교분리 원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오늘날 프랑스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위협받고 있는지를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생생히 증언한다.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사문화된 이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지 종교에 대한 원칙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과 신념에 어떻게 연결되는지까지 고찰한다.


transgenerationnel(트랑스제네라시오넬: 세대를 가로지르는)이란 단어에 얽힌 이야기도 인상 깊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심리적 연결성, 조상의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전해 내려오는 현상에 관심이 높다. 


이는 흡사 조상들과의 인연을 “칭칭 쟁이고” 사는 한국 사회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한국에서는 굿을 해서 조상 등의 영혼을 달래듯이, 프랑스인들은 기 치료사 등을 통해 먼 조상의 트라우마를 인지하고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계심리학’을 통해 가족 내 숨겨져 있던 비사祕事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며 화해해 매듭을 풀고자 애쓰기도 한다.


일명 ‘드라마 왕국’인 한국 사회를 향한 표현도 눈에 띈다. 바로 ‘vie par procuration(비 파르 프로퀴라시옹: 대리 인생)’. 이 말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왜 늘 복수극이 나오는지 질문받은 저자가, 한국에서는 법이나 사회적 정의가 드물게 작동하고 개인적 응징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드라마가 그 역할을 대신해준다고 답하자 상대에게 들은 말이다. 


한국인들이 드라마를 통해 ‘대리 인생’을 산다는 것. 같은 맥락에서 한국 드라마에 재벌이 많이 나오는 것도, 현실의 누추함을 가리고 대리 만족하기 위함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반면 드라마 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더 글로리〉 같은 복수극이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에서 인기가 시들했던 이유에 대해 살피며 문화적 차이도 논한다.


3부 〈풍요로운 공동체를 견인하는 말〉에서는 프랑스어 9개를 통해 모두의 권리를 위해 연대하고 뭉치는 프랑스의 끈끈한 공동체성을 살펴본다. 먼저 〈greve(그레브: 파업)-풍요를 분배하기 위한 시간〉 장에서는 ‘생존에서 삶’으로 프랑스인들을 도약하게 해준 단어인 ‘파업’의 역사를 세밀히 살핀다. 


이를 통해 ‘그레브’가 얼마나 프랑스에서 중요한 말이자 가치이며, 왜 프랑스 공동체를 논할 때 첫째에 놓여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레브만큼 중요한 말인 solidarite(솔리다리테: 연대)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 정부나 지자체가 ‘평등’에 방점을 두며 만들어내는 모든 정책에는 ‘솔리다리테’란 말이 들어간다. 이는 정책에서 시혜적 뉘앙스가 아닌, 그것을 받는 사람도 주체로서 함께하는 것이란 의미를 강화시킨다. 


이처럼 ‘연대’란 단어는 모두 평등하게, 굴곡 없이 모이게 해주는 말로서 공동체를 향한 프랑스 사회의 시선이 어떤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말에 담긴 프랑스 정신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파리에서 만난 말들>은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함께 전한다.


이 책에서는 프랑스 정신을 담은 말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에 길 잃은 프랑스 민주주의의 암담한 현실 등을 드러내는 말 또한 다룬다.


먼저 ‘On s’en fout(옹 상 푸: 아무도 관심 없어)’처럼 시대 분위기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는 말이 있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자주 쓰는 말 10위 안에 꼽힐 만한 이 문장은 타인의 시선이나 규범, 관습 따위를 가볍게 벗어던지는 말인 동시에 타인에 대한 연민, 관심이 제거된 지나친 개인주의가 발현된 것이기도 하다. 


2008년 유럽에 금융위기가 불어닥치면서 이 말은 금융자본주의 독재에 주눅 든 프랑스 청춘들의 절망과, 점점 싸늘해지는 세상을 표상하는 언어가 되어갔다.


oligarchie(올리가르시: 과두정치)처럼 소수의 자본과 정치가 결탁해 사회를 지배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보여주는 말도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집권하며 언론에 등장한 말이다. 당시 사르코지 정권은 투기로 인한 금융자본가들의 적자를 메꾸기 위해 아낌없이 국고를 털고, 이를 메꾸기 위해 복지와 공교육, 공공의료는 축소했다. 


이 부도덕한 현실에 맞서는 시위가 프랑스 곳곳에서 거세게 일어났고 거리에는 “우리의 삶은 그들의 이윤보다 소중하다Nos vies valent plus que leurs profits!”는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과두정치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한국 사회가 선거를 통해 민의가 반영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꼬집는다.


프랑스의 국민적 말 습관이 된 ‘du coup(뒤 쿠)’도 씁쓸한 프랑스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du(뒤)는 ‘원인, 기원’을 나타내주는 전치사이고, coup(쿠)의 의미는 ‘부딪침, 충격, 타격, 때리기’ 등이다. 


이 말은 2022년 이후 ‘그래서, 그러므로, 그러고 나서, 갑자기, 불현듯, 그 결과’ 등 다양한 의미의 말을 통폐합한 어휘로써, 연령과 계층 구별 없이 만인의 입에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국민적 말 습관이 되버렸다. 


‘뒤 쿠’는 빈약한 인과를 과장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말이 범람하는 원인을 저자는 현실에서 찾는다. “어제까지 축적된 경험과 오늘 드러나는 현실의 인과관계가 번번이 어긋나는 카오스에 처한 프랑스인들이 결핍된 현실의 논리를 채우기 위해 과도하게 차용하고 있는 응급 처방으로 보인다”는 것. 


‘뒤 쿠’는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사회,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세상에서 정신 줄 잡고 버티려 애쓰는 사람들의 현실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 사회의 언어 속엔 그 역동적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한다. 언어로 드러난 프랑스 사회의 단층을 살피며 독자는 반대로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말이 주로 쓰이고 있고 그것이 현실의 어떤 맥락을 담아내고 있는지, 나아가 우리 사회와 일상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할 계기를 얻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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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감각 - '에브리타임'에서 썰리고 퇴출당하며 벼려낸 청년들의 시대 감각 

나임윤경 외 13인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


'장애인은 본래 불편하도록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한국 같은 ‘특정한’ 사회에서 불편을 겪도록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그러므로 ‘사회적’ 혹은 ‘구성적’ 약자다. 따라서 사람들의 시선이 향해야 할 곳은 장애인이 아니라, 이들의 이동을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생계, 노동, 교육 등을 불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사회’이다.'

 

2022년 5월, 연세대학교의 한 재학생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소속 교내 청소노동자들의 집회 소음이 수업에 방해된다며 업무방해 혐의와 미신고 집회라는 이유를 들어 집시법 위반 혐의로 청소노동자들을 경찰에 고소했다. 


이어 6월에는 다른 두 명의 다른 학생과 함께(이후 한 명은 고소 취하) 청소노동자들을 상대로 수업료와 정신적 피해에 대한 630여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같은 해 12월, 서대문경찰서는 노동자들의 집회가 수업에 대한 업무방해로 볼 수 없다며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이어 검찰은 올해 2월 서대문경찰서에 집시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보완 수사를 요구했는데 재수사 3개월 만이자 고소 1년 만에 ‘혐의없음’으로 최종 결론 났다.


이 책은 ‘왜 한국 청년들의 공정 잣대는 (기득권자가 아닌) 약자를 향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교내 청소노동자 고소와 소송에 관한 보도를 접한 많은 이가 당혹감을 느끼며 같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당시 언론과 대중은 노동자와 학생의 ‘을과 을의 갈등’, MZ세대의 개인주의 성향, 노동조합과 집회를 바라보는 여러 시각 등 다양한 접근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보려 했다. 


나날이 자극적인 제목의 뉴스와 논평이 재생산되는 가운데, 한편으론 ‘청소노동자들을 지지하는 학생도 있지 않을까, 당연히 있을 텐데 왜 그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면 이 책이 작은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저자 나임윤경 교수는 “소수의 목소리 크고 선명성이 남다른 사람들의 압도적으로 많은 의견에 언론이 마이크를 갖다 대니, 그들이 마치 20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양하게 된 것”이라 말한다.


교내 청소노동자 고소 사건에서 보듯 정연한 논리와 맥락이 완전히 부재한 일부 청년세대의 ‘공정’,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부상한 ‘젠더 갈등’과 더불어 이른바 ‘이대남’ 현상에 관해 그간 학계와 정치권, 언론의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청년 담론은 자칫 세대 담론으로 흐르거나 정작 청년층을 타자화하기 쉽다.


이 책은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나임윤경 교수와 〈사회문제와 공정〉 수강생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기존 청년 담론의 한계를 넘어 일상에서 그들이 마주하는 문제의식과 고투, 변화 방안의 모색까지 그들의 목소리를 오롯이 담아내는 데 주안을 뒀다.


이 책은 ‘이대남’과 ‘이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MZ세대’라는 프레임에 가려진 ‘다른’ 20대를 가시화한다. 독자들은 한국 사회 전반에서 여전히 뜨거운 공정 담론이 능력주의와 결탁한 기성세대의 공정 개념과 논리를 모방, 답습하는 것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가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정은 어떠한 모습인지 함께 ‘공정감각’을 벼릴 수 있을 것이다.


교내 청소노동자 고소와 소송 소식에 온라인 대학교 커뮤니티 플랫폼 〈에브리타임〉에는 자신들의 ‘수업권 방어’를 위해 고소와 소송을 진행해준 이들을 지지하는 수많은 글이 올라왔다(물론 비판하는 글도 적지 않았다). 


그중 다수의 글에서는 수업권에 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확인되지 않은 거짓 정보, 청소노동자들을 향한 비난과 비아냥 등을 포함한 혐오 표현이 주를 이뤘다.


나임윤경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점 중 하나로 〈에브리타임〉에서도 똑같이 발견되는 “‘진실’이 맥없이 지워지고 ‘사실’이 근거 없이 조롱과 폄훼를 당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반지성주의’라 정의한다. 


반지성주의는 “‘아는 것이 힘(권력 혹은 권위)’이 아니라 전혀 모르거나 알려 하지도 않고 알면서도 비틀어버린 ‘거짓과 가짜가 진실과 사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힘’이 팽배해진 상태”다.


〈사회문제와 공정〉을 수강한 학생들이 과제로 〈에브리타임〉에 올린 글들에는 혐오 표현이 난무하고 반지성주의의 온상이 되어버린 〈에브리타임〉을 ‘민주적 공론장’으로 변화시킬 방안을 모색하는 그들의 고투와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또한 노동, 성차별, 능력주의(학벌주의), 장애인 인권, 성소수자, 기후 위기(비거니즘) 등 우리 사회 주요 의제들이 청년들의 일상에서 어떻게 벼려지고 실천되는지 보여준다.


학생들이 〈에브리타임〉에 올린 글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신고되고, 삭제되었으며, 글 작성자는 플랫폼 운영 규칙에 따라 일정 기간 접속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에브리타임〉을 민주적 공론장으로서 기대했던 학생들의 삭제된 (혹은 삭제될) 글들의 모음집이다.


이 책은 좀 다르고, 다양한 청년들의 글을 통해 지금의 ‘공정감각’이 실은 ‘공존감각’을 지워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대와 성별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보다 삭제된 글들의 복원을 통해 삭제되지 않고 남아 활개 치는 혐오 발언들이 지금 20대의 생각을 대표할 수 없음을, 20대가 ‘다른’ ‘다양한’ 사유의 주체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에브리타임〉에 신고와 삭제 기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기 글이 거의 실시간 수준으로 관찰당하고 있다가 전광석화의 속도로 삭제될 줄은 몰랐던 만큼, 같은 학교 동료 학생들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나임윤경 교수는 자기 글이 삭제되는 과정을 보며 의기소침해하던 학생들에게 수업이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삭제된 글들을 책으로 엮자고 제안했다. 쉽지 않은 설득과 독려의 과정을 거쳐 학생들의 생각과 글이 교내 또래 학생들이 아닌, 이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좀 더 많은 이에게 <공정감각>이라는 책으로 읽히게 됐다.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과 날카로운 정치사회 비평으로 책, 칼럼, 방송, 강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김누리 교수(중앙대학교 독문학과)는 ‘추천의 글’에서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시위하는 청소노동자를 고소하고 소송을 제기한 것은 대학의 죽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덧붙여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일체의 정치적인 것이 말끔히 표백된 탈정치의 공간으로 변했다. 어떤 사회적 참상이 벌어져도 대자보 하나 붙지 않는다. 그곳은 지성의 폐허, 정신의 황무지, 정치의 무풍지대가 되었다”라면서 대학의 사인(死因)을 진단한다.


김누리 교수가 “다행히, 그 속에서 유토피아의 기억을 간직하고 고투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승리는 불확실하지만 ‘역사는 이상주의자들이 좌절한 만큼 진보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라고 이 책의 저자들에게 보내는 지지와 응원처럼, “한국 사회에서 소통을 포기한 많은 이에게 벅찬 위로가 된다”는 서평가 정희진의 말처럼, 이 책은 어쩌면 ‘다른’ 20대의 목소리를 무척이나 듣고 싶었던, 그래서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나아가고 싶었던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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