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EEK in BOOK] '미련함'의 빛나는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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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EEK in BOOK] '미련함'의 빛나는 성적표

이해극, 그는 자칭타칭 ‘황당무계당 당수’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농작업에 필요한 기계들을 스스로 발명한 것도 황당한 일이었고, 도전했던 이들이 두 손 들고 나온 육백마지기에 유기농장을 일구겠다고 나선 것도 황당한 일이었다.

  • 이종은 gdaily4u@gmail.com
  • 등록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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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극 한국유기농생산자연합회 회장. 수많은 농기계를 발명해 농사일의 고됨을 획기적으로 줄였고, 고향 제천과 평창 육백마지기에서 수만 제곱미터 규모의 농장을 운영하는 그가 왜 자신이 ‘미련’하다고 하는 걸까? 그 이유를 알려면 그가 한국 유기농업인 1호라는 것부터 봐야 한다. 

 

1950년 ‘전쟁둥이’로 태어난 그가 고향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1970년대에 유기농업을 한다는 사람들은 “되지도 않는 짓을 하는 미친놈” “남 몰래 밤에 농약을 치면서 낮에 거짓말이나 하는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증산만이 지상목표이고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이 과학영농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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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그러나 이해극은 “화학농법을 쓰는 한, 농부가 아니라 죄인”이라는 깨달음으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유기농업에 앞장서왔다.

 

그런 신념은 평창의 육백마지기에서 꽃을 피웠다. 해발 1200미터 고지에 12만 평 규모의 드넓은 농토를 가리키는 육백마지기는, 1960년대 화전민들이 처음 땅을 일군 이래 고랭지 채소를 줄곧 생산하던 옥토였다. 

 

하지만 이해극이 이곳을 만난 1990년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한 수탈농업의 결과였다. 모두가 무모한 도전이라 만류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유기농업의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했다. 비록 자신은 실패하더라도 새롭게 도전할 누군가를 위한 본보기는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성공했다. 1995년의 기록적인 배추 파동 때에도 육백마지기에서는 오히려 풍작을 일궈냈다. 그 비결이 바로 유기농업이었다. 구체적으로 육백마지기에 적용된 농법은 호밀을 녹비작물로 재배한 것과 잡초와 공조해 ‘땅심’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휴경기 동안 호밀을 심어 지력을 높이고 잡초를 활용해 표토를 보호하는 농법은 겨울이면 혹한에 시달리고 여름에는 폭우에 흙이 모두 쓸려 내려가는 1200미터 고지 육백마지기에 꼭 맞는 것이었다. 이는 농부는 자연과학자라는 지론대로 그가 그곳의 자연환경과 작물의 생육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구했기에 가능했다.


필요하면 만들고, 만든 것은 나눈다


그가 그저 유기농업인이 아니라 성공한 유기농업인이 된 데는 또 하나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땅과 물은 물론 동물, 궁극적으로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제초제 같은 농약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다. 

 

농작업은 일일이 사람 손을 필요로 하는 데다가 조금이라도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다 망친다. 유기농을 하는 이들이 그 농사 규모를 키우지 못하는 이유도 일정 정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해극은 발명가가 되었다.

 

농사를 짓다보니 필요해서, 또한 농작업의 정확성과 농민의 편리함, 그리고 안전을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만 해도 온도 경보기, 변온 씨앗 발아기, 자동 파종기, 모종 식혈구, 비닐하우스 자동화에 없어서는 안 될 환기창 자동 개폐기다. 

 

이들 발명품을 통해서 농사를 짓는 것 이상의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모든 이가 사용하고 개량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내놓고 그 자신은 농사에 더욱 매진했다. 오히려 농업과 발명의 경험을 나누는 데 앞장섰다.

 

그의 경험을 나눠 받은 이들은 북녘에도 있다. 1990년대 후반 금강산 관광 사업과 연계된 ‘남북 농업 협력 사업’의 일원으로 북한 고성군에 대규모 시설농장을 세우고 농업 노동자들에게 영농 지도를 하는 일을 책임진 것이다. 

 

오랜 분단의 역사와 서로 다른 체제로 인한 갈등을 딛고 농토 위에서 작은 통일을 경험했던 그는, 한시라도 빨리 통일농업이 재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자칭타칭 ‘황당무계당 당수’라 불린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농작업에 필요한 기계들을 스스로 발명한 것도 황당한 일이었고, 도전했던 이들이 두 손 들고 나온 육백마지기에 유기농장을 일구겠다고 나선 것도 황당한 일이었다. 

 

이는 남북 농업 협력을 위해 북한에서 살다시피 하며 금강내기라는 자연과 싸우고 북한의 관료체제와 싸운 것 역시 황당무계당 당수다운 행동이었다. 

 

그는 실패 또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으며 미련하게 도전했고, 되살아난 땅 위에 펼쳐진 초록 들판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런 행복을 좀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유기농업의 가치를 생산자뿐 아니라 소비자와도 공유하려는 또 다른 도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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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극 '미련해서 행복한 농부'(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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