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곳으로부터 온, 새로운 편지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G-SEEK

아주 먼 곳으로부터 온, 새로운 편지

[질문하는 책] 국제관계사
박건영 지음, 사회평론아카데미 펴냄

"유럽인들이 만든 개념과 용어를 사고의 문법으로 사용하는 

비서구인들은 유럽중심주의에 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필자는 앞서 암시하였지만 서구 강대국 중심주의가 대체의 대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필자는 국제관계사가 서구 강대국 중심주의를 예민하게 의식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독자적인 비서구적 개념과 문법을 창조·도입해야 한다

는 주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거나 최소한 유보적이다. 서구 강대국 중심주의가 왜

곡하고 간과한 역사에 빛을 비추어 국제관계사의 보편성을 중대하는 것과 서구의

역사, 특히 서구의 평창역사를 비서구적 개념과 문법을 사용하여 비서구적 관점에

서 조명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특히 후자의 동기(motive)가 보편성과 피리되

어 무분별하게 강조될 경우 내러티브(narative)가 정치화되어 객관성의 측면에서

역효과가 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반복하건대, 수많은 국제관계

의 사실들이 저장되어 있는 사고에서 특정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선택하는

과정은 고도의 주의와 분별력을 요구한다. 한국적 이익이나 정체성, 나아가 방기

된 비서구적 역사가 서양강대국 중심주의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반제국주의적

정당성이나 민주적 당위성이 지나철 경우, 필자가 이 프로젝트에서 극복하려고 하

는 '허구적 보관주의 의 모순. 오류를 '역전된 형태'의 '하구적 보편

주의로 극복하려는 우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역

전된 허구적 보관주의는 국제관계사의 현실상의 측면에서도 중대한 문제를 야기

수 있다. 국제관계의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온 주제는 강대국들이고, 국제관제의 유

지와 변동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온 주제도 강대국들이다. 따라서 국제관계

이론이나 국제관계사의 민주화라는 관점은 국제관제의 이러한 권력정지적 현실의

수용이라는 임계치 내에서만 현설적으로 타당하다 할 것이다." 

 

korean-veterans-war-memorial-3426779_1280.jpg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이면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누군가가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다. 그들이 실제로 살아온 역사의 한 장 한 장을 담고 있는 그 ‘편지’는 지금의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의 원인을 짚어주면서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다만 세상 어디에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역사서는 없다. 구체적 시·공간의 영향하에 놓인 사가의 가치관이나 관심사에 따라 사실들이 선택되고 '역사적 사실'로 편입돼서다. 

 

국내에는 국제관계의 역사를 다루는 걸출한 저서들이 몇 있다. 하지만 몇 가지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특히 이들은 현재와 미래의 국제관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간적으로 대과거(大過去, 너무 먼 과거)에서 출발하고, 냉전의 국제관계사를 담고 있지 않거나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고, 냉전 종식 후 비밀해제된 문건도 반영하지 않고 않다.

 

냉전기에 주목하고 비밀해제 문건들을 섭렵한 서양 학자의 저작 중에는 개디스(John Lewis Gaddis), 영과 켄트(John W. Young and John Kent)가 잘 알려져 있고 맥윌리암스와 피오트로우스키(Wayne C. McWilliams and Harry Piotrowski)의 책은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쓰여진 역작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저작은 공통적으로 미국 또는 서양 중심의 시각에 기초해 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아울러 이 저작들은 냉전의 기간과 미소 간 대립에만 초점을 맞추어 냉전이 1차대전, 러시아혁명, 2차대전 등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적 기원(起原)에 대한 토론을 생략하는 문제도 갖고 있다.

 

일례로 <국제관계사: 사라예보에서 몰타까지>에서 저자가 이루려는 목적 중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한국 내 국제관계사 탐구의 빈곤을 극복하고, 서양 중심 국제관계사의 ‘편향적 선택(selection bias)’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건영 교수(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의 저작인 <국제관계사>는 그동안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기술된 국제관계사가 은연중에 담고 있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편향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비서구적 민족주의나 국수주의가 빠질 수 있는 역편향의 위험성을 동시에 경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관계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이 책이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냉전 종식까지의 국가 간 관계를 단순한 균형이나 중립이 아닌 철저히 고증된 사실(not neutrality but truthfulness)에 입각해 이론·정책·역사가 동시에 반영된 통합적 관점으로 재조명한 역사적 분석이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러시아, 베트남, 한국 등에서 비밀이 해제된 외교 문건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토대로 이미 검증된 기록과 정설로 받아들여진 역사에 대한 타당성을 재검증했고, 그간 영어로만 돼 있던 수많은 문건을 이런 원본들과 일일이 비교·대조하면서 역사적 증거로서의 객관성과 타당성을 확보한다.

 

책은 19세기 말부터 냉전의 종식 때까지의 국제관계사를 담고 있다. 국제관계의 역사에 대한 탐구는 ▲주권(主權, sovereignty)이라는 새로운 유럽중심적 정치 개념이 어떠한 형태의 수용과 변용, 저항을 거쳐 다른 권역으로 전파(傳播) 또는 확산됐는지 ▲국가라고 불리게 된 이러한 주권적 정치 주체들이 이익, 이념, 위엄(prestige), 명예(honor), 가치(value)를 추구하면서 정복, 약탈, 사대자소(事大字小), 이이제이(以夷制夷), 타협, 균형, 편승 등 어떠한 수단으로 상호작용해 왔는지 ▲이러한 상호작용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결과와 그것이 다음 단계의 국가 간 상호작용에 어떠한 배경이 됐는지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제1차세계대전에 이르게 되는 정치외교적, 경제적, 군사적 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 시작한다. 1차대전은 인류가 겪은 최초의 세계 수준의 제국주의적 전쟁이라는 기원적(紀元的)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전역을 물질적, 관념적으로 강타한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짓고 유럽의 국제관계를 100년간이나 보수적 유대(conservative unity)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외교에 기초하여 안정적으로 관리한 ‘비엔나 체제(the Concert of Europe)’가 1차대전을 기점으로 그 근원에서부터 해체되었다는 점에서 외교사나 국제관계사적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나아가 이 책의 주요 지향점이 냉전기 국제관계사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의 추구라 할 때 냉전의 시작은 2차대전의 결과와 긴밀히 연결되고, 2차대전은 1차대전의 결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때 분석과 논의를 1차대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실하고 타당하다고 하겠다.


저자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베트남, 한국 등에서 비밀해제된 외교문건들을 면밀히 검토 분석해 이미 검증된 기록과 정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정설을 위한 건설적 논쟁을 추동하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이로써 궁극적으로는 국제관계의 역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크기변환]k422638484_1.jpg

 

 

"일본의 아베 총리는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

가운데 '침략 이라는 표현에 대해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

가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나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또 태평양전

쟁 책임자들을 처벌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승자의 판단에 의한 단죄"라 하였다.

당시 일본 국민 70%는 아베를 지지하였다.

일본의 인기 있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19세기부터 이 시대에 걸쳐 세계 각국과
지역들은 타국의 식민지가 되든지 그게 싫으면 산업을 부흥시키고

군사력을 갖춰 제국주의국가들의 동료가 되든지 하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유

신을 통해 자립의 길을 택한 이상, 일본은 이미 그때부터 타국(조선)에게 피해를 입

힌다는 것을 전제로 내 나라의 자립을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즉 일본은 조선정복

을 고집해야 하는 역사적 단계에 있었다. 만약 이를 버린다면 조선은커녕 일본마저

도 러시아에 병합돼 버린 위험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러일전쟁이란 무엇이었

나?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냉각된 후세라는 시점에서 봐도 러시아

는 일본을 고의로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궁지에 몰린 쥐로 만들었다. 일본으로서는

사력을 다해 고양이를 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되돌아 보건대, 19세기 중반 식민지 건설과 제국주의를 반대한 영국과 프랑스

국민은 얼마나 되었던가? '콩고의 도살자'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의 위대한 영웅

으로 남아 있다. 비약이긴 하나, 한국은 제국주의국가들이 해외침략을 국가정책화

하고 있을 때 자신의 주변에 약소국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인류적 정의의 편

에 섰을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또는 제국이 되기 위해 제국주의적 침략에 기꺼이

동참했을까?"

 

국제관계사의 학문영역에서 서구 강대국 중심주의란 19세기 이후 국제관계의 역사에서 서구문명을 주체로 설정하고 비서구문명을 타자로 포섭하면서, 서구문명이 구성한 국가 간 관계의 역사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역사기술을 의미한다. 

 

서구 학자가 서구 중심의 국제관계사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은 불가피한 사실일 터다. 문제는 이것이 학문적 의제설정 권력을 행사해 비서구인들에게 문제의식의 서구화를 강제함으로써 자기 사회에 대한 독자적인 문제의식을 형성하지 못하거나 자기 사회의 맥락과 유리된 문제의식을 갖게 만든다는 데 있다.

 

실제로, 주류적 서구 강대국 중심주의적 관점은 한국인, 아시아인 또는 비서구인들이 알아야 할 역사 또는 현재나 미래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는 역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명하지 않고 있고, 한국을 포함하여 비서구적 국제관계사의 대부분도 서구의 담론적 권력에 포섭돼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 강대국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는 사적(史的) 관념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기존 국제관계사의 관심과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한국인과 비서구인의 입장에서 알아야 할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카(E. H. Carr)의 용어를 빌리자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의 영역으로 포함하는 것을 <국제관계사: 사라예보에서 몰타까지>의 주요 집필 목표로 삼고 있다.

 

저자는 국제관계사라는 특수한 주제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정책과 이론과 역사를 종합적으로, 유기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인식의 틀, 즉 국제정치 특유의 이론·정책·역사의 ‘통합적 삼각인식구조’를 상정하는 총체론적(holistic) 접근법이 필수불가결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역사적 결정과 행위, 나아가 그것들과 교호하는 구조의 힘과 변동에 대한 역사 주체들의 주관적 인식을 분석할 때뿐 아니라, 그것들을 국제관계의 역사로서 선택하고 분석·서술하는 사가의 객관적 시각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통합적 삼각인식구조’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에 저자는 국제정치를 주도하는 현실적 역학관계의 역사를 존중하면서도 한국인이나 비서구인이 알고 싶은 역사, 어떻게 보면 서구적 주체들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흑역사'를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진정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역사에 근접하는 역사서가 가능하다고 봤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첫 출간 이후 개정판이다. 국제관계사의 핵심 중 하나인 중동의 정치와 국제정치에 관한 내용을 추가했다. 이를 통해 ▲이란의 이슬람혁명과 미국 레이건 정부의 ‘이란-콘트라 스캔들’ ▲이란 이슬람혁명의 여파로서 미국이 개입한 이란-이라크 전쟁 ▲중동정치의 거대한 관념적, 정서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분파들 간의 경쟁과 충돌에 관한 역사 등을 접할 수 있다.

 

더불어 전쟁과 전투 과정을 서술할 때 군사적인 전술, 전략적 개념과 용어를 순화하고 보다 상세히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일례로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의 ‘쉴리펜 계획’이 실패한 이유, 그리고 북베트남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이유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여기에 ▲한국과 중국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회담에 초대받지 못한 이유와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1965년 한일협정과 청구권 협정이 한미일 관계의 전개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국제적 조약과 협정들이 ‘한국의 국제관계’의 정체성 형성과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한국전 당시 맥아더의 만주 핵폭격 구상이 어땠는지 등에 대해 현장감 있게 설명해준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