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였던 소년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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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저작

너였던 소년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어라

[또 한권의 벽돌]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주제 사라마구 지음, 박정훈 옮김, 해냄 펴냄

"내가 태어난 집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나는 이 사실에 무

덤덤하다. 그곳에서 살던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지 않기 때

문이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로 돌무더기로 변해버렸다. 그렇

지만 이 다른 집은 내게 10년, 혹은 12년 동안 최상의 거처

였다. 조제파 외할머니와 제로니무 외할아버지의 오막살이

로 내가 가장 친밀하게 여긴 곳이자 나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장소였다.

내게 그곳은 마술적인 누에고치였다. 그곳에서 유년기와

소년기 시절에 여러 차례 결정적인 변신을 할 수 있었다. 이

미 오래전에 그 집의 상실로 인한 고통은 가셨다. 기억의 복

원력 덕분에 어떤 순간에도 추억의 하얀 벽을 세울 수 있다.

집 입구에 그늘을 드리운 올리브나무를 심고, 쪽문을 여닫

을 수 있다. 똬리를 튼 작은 뱀을 보았던 받의 울타리를 여

닫을 수도 있고, 젖 빠는 새끼 돼지들을 보러 우리로 들어

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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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자이자 <눈먼 자들의 도시>로 잘 알려진 계적인 거장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은 그가 2010년 세상을 떠나기 4년 전,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는 바로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록이다.


사라마구의 관심이 소년의 자신과 노년의 자신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기에 소년의 기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자서전의 형식 또한 파격적으로 이뤄져 있는데, 연대기 순서에 따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선착순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심지어 책의 후반부에서는 전반부의 틀린 기억을 바로잡기도 한다.

 

사라마구는 출간 직후 한 인터뷰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독자들이 알기 바란다”는 바람을 강조했다. 그의 의도대로 이 책을 접한 독자들은 소년기의 기억이 우리 삶의 원천이란 것, 성인이 되고 노인이 돼도 지속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욕망과 상처, 기쁨과 슬픔의 밑동에 유년기가 튼튼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라마구의 픽션은 탄탄한 서사구조, 스케일이 장대하고 발상이 도저한 허구적 상상력으로 유명하다. 그의 소설에서는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나가 대서양 위를 떠돌아다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눈이 멀고,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멈추어 아무도 죽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사라마구의 소년 시절에도 세상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쿠데타가 벌어지는 등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소년이 대사건을 겪는 방식에 주목할 만하다. 

 

사실 우리 삶의 기억을 차지하는 것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거대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그 대사건과 무관하지는 않을지라도 내 삶과 실핏줄처럼 연결된 소소한 일화들이다. 

 

소년 사라마구의 천진함과 어리석음, 기쁨과 고통, 두려움과 안도감이 그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였던 소년의 것이기도 하다. 사라마구의 기억 속에 알알이 박혀 있는 불멸의 작은 이야기들을 우리 또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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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당신은 당신의 집 입구에 앉아 있었다. 집은 별들

이 반짝이는 거대한 밤을 향해, 당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

고 결코 여행하지도 않을 하늘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들녘과 그늘을 드리운 나무들의 침묵을 향해 열려 있었다.

할머니, 당신은 말했다. 아흔 살 인생의 평정심과 한 번도

잃은 적 없는 소녀 시절의 불꽃으로,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

단다, 그래서 죽는 것이 너무도 슬프단다. 정확히 이 말씀을

하셨다. 임종의 순간에 내가 거기 있었다."

 

책은 작은 마을을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지냐가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사라마구는 18개월 때 리스본으로 이사를 하고, 두 마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네 살 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형을 회상하면서 이른바 ‘가상기억’에 대한 개념을 탐구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겨울 새끼 돼지들이 추울까 봐 침대로 데려왔던 일을 떠올리며 그들에 대한 애정을 새삼 느낀다. 

 

사라마구는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해독하며 문학과 처음 접하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어 가이드책에서 재미있는 대화를 고민하기도 하는데, 그는 실제로 몰리에르의 연극을 읽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 밖에 아지냐가와 리스본의 아름다운 풍경, 가족, 친지, 이웃과의 이야기, 자신의 성(姓)인 ‘사라마구’의 유래, 질투와 같은 감정, 성적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낸 이 책은 어린 시절부터 단어와 이야기에 매료되어 세계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등장한 예술가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를, 저자의 어린 시절 추억을 통해 서정적인 초상화를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책을 옮긴 박정훈 번역가는 "<주제 사마라구, 작은 기억들>을 읽으면 우리 모두 소녀와 소년이 되어갈 것이다. 어느새 푸른 도마뱀의 시절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작가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소년기에 대한 거대한 기억의 양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금언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너였던 소년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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