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를 위한 방을 생각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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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를 위한 방을 생각할 시간

[책으로보는세상]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지음, 라이프앤페이지 펴냄

[지데일리]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집을 부동산적 가치, 재테크 수단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런 단순한 관점은 집이 사회적 의미와 상징으로 복잡하게 얽힌 배경이자, 정서적 기억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망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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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팬데믹 시대를 맞아 집이 갖는 의미는 더욱 각별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집이라는 부동산을 향한 욕망과 그 욕망을 부추기는 행태는 수많은 이들에게 좌절과 불안을 가중시킨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이런 혼란의 시대에 집이 갖는 본질적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경제적인 부침과 함께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극과 극의 주거 형태들을 경험한 한 여성의 자전적 이야기이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집과 개인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누군가는 향수를, 누군가는 지금의 현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이 읽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과거와 현재로 떠나게 하는 힘은 저자 하재영의 솔직한 고백과 이를 뒷받침하는 탁월한 문장력에 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부합하는 언어로 집을 둘러싼 기억의 서사를 섬세히 직조해나간다. 


단편소설로 등단하고 두 권의 소설책을 출간하기도 한 저자가 집을 유지하기 위해 생계를 감당하는 글쓰기를 하며 ‘집필 노동자’로 살기로 결심하는 장면이나 남루한 현실을 감추려 애쓰던 기억을 담담히 써내려간 글은 인간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삶의 배경을 선택하는 일”이다. 저자는 자신이 살아온 수십 개의 방이 그의 정체성과 욕망을 형성했다고 말한다. 장소와 공간으로서의 집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거대하다.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적산가옥촌, ‘대구의 강남’이라 불렸던 수성구의 고급 빌라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던 기억, 20대 서울 상경 후 살았던 강북의 아홉 개 방과 신림동 원룸, 재개발이 빗겨간 금호동 다가구주택.


30대 진정한 독립을 이룬 행신동 투룸, 정발산의 신혼집, 북한산 자락 아래 구기동에서 오래된 빌라를 수리하고 안착하기까지. 저자가 경험한 대구와 서울의 한 시절이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강물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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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저자는 가족과 집, 여성과 집, 자아의 독립과 집, 계급과 집 등 다층적이고도 본질적인 집의 의미와 가치를 유연하게 탐험해 나간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오래도록 미뤄두었던 질문을 마침내 마주할 수 있다.


저자의 글은 집을 통해 본 한 여성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가 ‘자기만의 방’, 온전한 ‘나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이다. 이는 어머니 세대로 대표되는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으로부터 출발한다. 


유년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세 삼촌을 포함한 대가족의 살림을 홀로 전담한 그의 엄마는 집에서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며느리-아내-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조차 불리지 못했음을 저자는 가슴 아프게 깨닫는다.


“북성로 집에 살던 어느 날, 내가 거실과 주방에 없는 엄마를 찾으러 다니며 엄마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느꼈던 기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엄마의 자리, 엄마의 일이 다른 어딘가, 다른 무언가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본문에서


저자의 깨달음은 ‘자기만의 방’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그에게 ‘자기만의 방’이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대한 욕망이 아닌, “나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단순히 서재를 마련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공간에서 “나의 서사를 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나만의 자리’를 향한 오랜 애착은 마침내 답을 찾은 듯 보인다. 


나아가 그의 모습은 아직 자기의 자리를 갖지 못한 많은 이들을 부추긴다. “각자의 안에는 그가 살아온 집이 들어 있다.” 이 책을 읽은 후 내 안에는 어떤 집이 들었는지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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