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예쁜' 벌레 속에 인간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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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예쁜' 벌레 속에 인간이 보이네

[질문하는 책]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거야
김준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지데일리] 과학자라고 하면 아마도 고글과 흰 가운을 착용한 연구원이 총천연색의 시약이 들어 있는 비커를 진지하게 관찰하는 장면 혹은 플라스크에 든 액체가 연기를 내며 보글보글 끓어 오르면 “음, 성공이야” 하며 웃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습을 가장 먼저 연상할지도 모른다. 


대개는 그렇지 않다. 사실상 연구실에서 일하는 과학자의 겉모습은 일반적인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과 다르지 않다. 좀 실망스럽겠지만, 실제로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대번에 “이 사람은 과학자야!”라고 누구나 알아볼 만큼 특별한 과학자의 아우라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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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이나 미드 같은 대중매체에서 과학자는 어떻게 사용해도 근사한 소재다. 대중매체 혹은 책 등을 통해 만들어진 스테레오타입 때문에 우리는 과학자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자가 현실적으로 뭘 하는지 아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루 평균 14시간을 근무하고 최저임금에 가까운 월급을 받으며, 심지어 그마저 정규직이 아니어서 늘 미래에 대한 고용 불안감을 안고 있다. 이들 가운데 처지가 좋은 경우에는 휴일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지만, 주말은커녕 명절 연휴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거야>의 저자 김준은 대학 기초과학연구원 박사후연구원으로, 이공계에서 가장 취직 안 되기로 유명하다는 생명과학, 그중에서도 세상 쓸모없다고 천대받는 ‘선충’의 유전자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별수 없는 연구 노예”라고 자조하지만, 사실은 2019년 6월 첫 번째 제1저자 연구논문이 국제 학술지 <게놈 리서치(Genome Research)> 표지논문으로 선정됐다. 

 

지난해 2월에는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최우수박사학위논문상을 수상했으며, 올해 6월에는 두 번째 제1저자 겸 교신저자 연구논문도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 <뉴클레익 애시드 리서치(Nucleic Acids Research)>에 연이어 실린 매우 전도유망한 젊은 과학자다.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그의 앞길에는 빛나는 꽃길만 펼쳐져 있을 것 같은데, 그 역시 다른 수많은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처럼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는 틈틈이 채용 정보 웹사이트를 새로 고침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젊은 과학자들이라면 누구나 꿈꿀 ‘안정적인 연구직’은 그에게도 역시 하늘의 별 따기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어조는 줄곧 밝고 경쾌하다. 비록 밤잠을 설치고 코피를 쏟아가며 실험을 할지언정, 또 같은 꿈을 꾸었던 학부 동기와 선후배들이 현실을 깨닫고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떠나갈지언정, 끝내 과학자라는 오랜 꿈을 지키기로 한 저자에게 과학이란 언제까지나 그의 인생의 최종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생에 잘못을 저질러 결국 과학자라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모두 귀여운 투정으로 느껴질 정도로 책의 페이지마다 온통 과학을 향한 애정이 묻어난다.


이 책은 과학자의 에세이임에도 온갖 생물들 이야기가 책의 곳곳에 등장하며, 에세이에서 신기한 생물들 이야기로, 다시 쉽게 이해하는 생명과학 이야기로 장르를 넘나든다. 

 

특히 저자의 주요 연구 생물인 ‘예쁜꼬마선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딴 거 연구해서 뭐 해? 그럴 돈 있으면 암이나 연구해!”라는 소리를 듣게 만드는 바로 그 생물이기에 저자가 예쁜꼬마선충의 설명에 들이는 공은 아주 정성스럽다.


예쁜꼬마선충은 실처럼 길쭉하게 생긴 아주 작고 단순한 생물로, 언뜻 생각하면 인간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과 예쁜꼬마선충의 유전자는 무려 70~80퍼센트가량이 동일해서, 인간을 상대로는 할 수 없는 다양한 유전자 조작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고마운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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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꼬마선충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성이다. 꼬마선충은 900여 개의 체세포와 300여 개의 신경세포 그리고 2만여 개의 유전자로 구성돼 있다. 이는 다른 다세포 동물과 비교했을 때 매우 단순한 구성이다. 

 

이러한 단순성 때문에 이 생명체의 세포 계보 지도와 신경 네트워크 그리고 유전자 네트워크 지도 등이 이미 상세하게 밝혀져 있어 발생학과 신경 생물학 연구에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몸이 투명하고 생애 주기가 3주로 짧아 변이를 연구하는 유전학 연구에도 매우 적합한 특성을 가진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단순한 벌레에 대한 연구가 너무도 달라 보이는 우리 인간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시드니 브레너와 로버트 호비츠, 존 설스턴은 2002년 예쁜꼬마선충을 이용한 연구로 ‘세포 사멸’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밝혀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3년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인간 게놈 프로젝트(인간 유전체 지도 분석 사업)’ 성공의 밑바탕에도 예쁜꼬마선충 연구가 있었다. 인간 게놈을 밝히기 위한 연습문제로서 예쁜꼬마선충 게놈 지도를 먼저 작성해 성공의 경험을 쌓았던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쁜꼬마선충 연구를 비롯한 ‘쓸모없는 연구’들은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바꿀 중요한 연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하는 우리나라의 연구 지원 체계 아래에서는 경제적, 산업적 이익으로 직결되지 않는 기초과학 연구의 설 자리가 아직도 부족한 상황이다.


‘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가 사랑해 마지 않는 다양한 생물 연구들이 우리 사회의 경제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대받는 상황을 유쾌하게 반박하는 이야기다. 


나아가 오직 과학이 좋아서 불투명한 미래와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쓸모없는 연구’를 하고 있는 이들, 기초과학에 몸담은 젊은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당부이기도 하다.


저자는 지금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연구라 할지라도 이러한 연구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순간 인류의 지식의 한계를 한 뼘 더 확장할 수 있게 되기를, 또한 그러한 인식과 공감대가 우리 사회에 형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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