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의 느낌'을 잘 간직하시라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느낌'을 잘 간직하시라

[질문하는 책] 건축가의 도시
이규빈 지음, 샘터 펴냄

[지데일리] 좋은 도시에는 다양한 삶을 수용하는 다양한 형태의 건축이 있다. 물론 모양이 다른 건축이 많다고 해서 좋은 도시가 되지는 않는다. 

 

제목 없음.jpg


이탈리아 피렌체가 아름다운 것은 위용을 자랑하는 성당의 첨탑 뒤에 규칙적인 붉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북촌이 매력 있는 것은 그곳에 자리한 한옥들이 질서를 갖고 있어서다. 멋진 도시가 되려면 건축의 내부 공간은 다양하되 도시의 외부 공간은 질서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혹은 우리가 여행한 공간을 만나고 이해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렇다면 건축물과 도시를 설계하고 만드는 건축가는 이 공간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건축가의 도시>는 우리가 서 있거나 여행했거나 가고픈 그곳, 그 공간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 중국, 미국, 브라질, 프랑스 등 다섯 개 나라의 건축과 도시에 대한 글은 고유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저자 이규빈은 단순히 건축물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그 공간이 지닌 역사적 배경과 의미, 그리고 그곳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다른 건축 기법과 설계 방향에 대한 그의 설명에는 다양한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저자가 그린 사십여 장의 설계 도면과 건축물의 세밀한 미학을 포착해낸 사진도 주목할 만하다. 건축과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탄생한 공간은 어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지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사진과 설계 도면은 독립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일련의 상호성 속에서 우리의 지평을 확장해준다.


건축가는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공간을 완성하려면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이 건축 계획안을 그려낼 수 있었던 원동력을 건축적인 영감이나 부지런한 손이 아닌, 중국 현지 조사를 할 때 음식 한 접시로 주민들과 교감했던 진심이라고 말한다. 세계 곳곳의 삶의 현장을 치열하게 돌아보며 공간과 건축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나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도 여행은 건축 설계에 영감을 준 최고의 수단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세계의 도시들을 출장과 여행으로 오가며 기록한 글과 사진에서 우리는 낯선 도시와 공간을 바라보는 건축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의 난징 대학살 기념관은 건축물의 재료나 입면, 설계 구성 등에 날카롭고 불편한 형태를 차용함으로써 공간이 지닌 진실과 슬픔의 무게를 표현하고 있다. 또 미국의 9·11 추모공원과 기념관은 겉으로 드러나는 건축도 기념비도 없지만 ‘빈자리’와 ‘부재의 풍경’으로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인간의 슬픔이 창의적인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시간들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라 투레트, 생폴 드 모졸, 세낭크 수도원은 프랑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장소이다. 수도원이 간직해야 할 영성은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크기변환]g.jpg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지운 수도원을 오르내리며 인간은 경건을 준비하고 경건을 내려놓는다. 어디까지가 지형이고 어디까지가 건축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고흐드의 절경은 그 존재만으로 영성이다. 


저자는 프랑스 수도원 기행을 통해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자연을 통해 조화와 비례와 균형을 얻는다고 넌지시 말한다.


건축은 단단하고 도시는 거대하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건축과 도시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 쉽게 착각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일생이 건축과 도시의 시간보다 터무니없이 짧기 때문이다. 사람이 변하면 시대가 변하듯 건축과 도시 역시 늘 변화한다. 


1985년 민주화를 맞이한 브라질. 고국으로 돌아온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기고 2012년 104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건축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며 좌절했던 그의 건축물에는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진이 걸려 있다.


건축가는 여느 사람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여느 사람에게 유리는 그냥 유리이지만 건축가에게 유리는 투명성과 반사성을 지닌 마법과도 같은 건축 재료인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건축물의 내밀한 이야기를 건축가의 시선으로 들려준다.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건축물에는 미학적 완성도를 넘어 인간이 깃들어 있고, 자연이 깃들어 있고, 끝끝내 기억되어야 할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최고의 여행 메이트는 건축가라는 말이 있다. 여행이란 새로운 도시를 거닐고 건축을 돌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계의 낯선 도시들을 건축가와 함께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한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