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책] 자연계 암컷들의 진면목.. 루시 쿡 '암컷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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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책] 자연계 암컷들의 진면목.. 루시 쿡 '암컷들'

  • 손유지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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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출산율 0.78명 시대, 모성은 요즘 여성들은 물론 과학자들에게 관심 받지 못한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동물의 암컷은 늘 어머니와 동일시되어 왔으며, 천성인 모성으로 육아에 헌신하는 존재로서 그려졌다. 모성은 애착 호르몬인 옥시토신의 영향을 받지만 저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케냐 킬리만자로에서 일곱 세대에 걸쳐 1,800마리가 넘는 노랑개코원숭이를 연구한 동물학자 진 앨트먼 프린스턴대학교 동물행동학과 명예교수에 따르면 영장류에게 모성이란 ‘양육과 생존 사이에서 끊임없이 협상하는 줄타기’다.

 

매일 수 킬로미터씩 이동하며 먹이를 찾는 개코원숭이 암컷은 초산일수록 새끼를 제대로 안는 법도 모른다. 초산의 영아 사망률은 무려 60%에 이르고, 새끼를 많이 낳아 경험이 쌓일수록 사망률은 급격히 줄어든다. 

 

생존율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조건은 어미의 계급이다. 먹이에 우선권이 있는 상위 계급 암컷의 새끼는 어미가 지닌 네트워크의 호위를 받으며 더 건강하고 독립적인 개체로 성장한다. 

 

그러나 하위계급 암컷의 새끼는 다른 수컷에 의해 살해당할 가능성이 크고 어미의 집착과도 같은 보호 아래 상대적으로 느리게 독립한다. 이에 따라 암컷의 에너지는 점점 고갈되고, 사회적 불평등 앞에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새끼를 학대하기에 이른다.

 

흥미롭게도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이 임신과 수유의 세계에서 풀려나면 오히려 자식에게 헌신하는 주체는 주로 아빠다. 조류 대부분은 부모가 새끼를 함께 돌보고 양서류는 싱글대디, 싱글맘에서부터 공동육아에까지 다양한 돌봄 전략을 보여준다. 

 

공동의 탁아소를 짓고 새끼를 키우는 백목도리여우원숭이를 비롯해 포유류의 3%는 남의 새끼를 돌보고 부양하는 알로마더, 즉 다른 엄마들의 절실한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동물 세계의 다양한 돌봄 전략은 인간이 그 어떤 유인원보다 크고 무력하게 태어나지만 훨씬 빨리 번식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바로 돌봄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하나의 사회가 보호자의 역할을 공유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공감과 협력,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진화되었다는 사실에 착안해 ‘다정함과 덜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모성본능을 깨울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케냐 마라이 국립공원의 밤, 저자는 탐사 차량 주변을 서성거리는 암사자 때문에 공포의 하룻밤을 보낸다. 암사자는 녹음기 속 수컷의 울음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빠져나와 다른 수컷과 밀회를 즐기러 온 것이다. 

 

생물학에서 이형접합(암수 배우체의 근본적 차이)은 암수의 성 분화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까지 결정하며, 이에 수컷은 방종하고 암컷은 까다롭고 정숙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암사자의 방탕함과 바람기는 동물의 왕국에서 유일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진부한 성역할이 씌인 것일까. 저자는 동물들의 진짜 모습을 아직 인간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락 말한다.

 

구애를 받는 암컷은 경쟁하는 수컷의 매력과 성적 요구에 ‘마지못해’ 응한다고 설명했던 다윈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연계의 암컷들은 성적 방종 그 자체를 보여준다. <암컷들>은 바람둥이 암사자를 비롯해 폭압의 여왕인 미어캣, 수컷을 차지하기 위해 피 튀기며 싸우는 토피영양, 레즈비언이 된 알바트로스와 나이 든 범고래 여족장 등 수컷보다 방탕하고 생존을 위한 투사로 살아가며 무리 위에 군림하는 자연계 암컷들의 진면목을 과감하게 펼쳐낸다.

 

한 연구에 따르면 빅토리아 시대 충실한 부부의 모델로 삼았던 명금류 새 바위종다리 암컷이 실은 두 마리 수컷과 250회 이상 짝짓기 하느라 바빴다. 사회적으로 일부일처성인 암새의 90퍼센트가 다수의 수컷과 교미하는데, 이러한 바람기는 더 나은 유전자를 선택하기 위한 수단임은 물론 친부가 누구인지 혼동을 줌으로써 영아 살해의 위험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고 양육 과정에서 도움도 받기 위한 교묘한 전략이다. 

 

과학자들의 확증편향과 편견 너머 동물계의 암컷들은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 성적으로 해방된 삶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일말의 수치심도 느끼고 있지 않다.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산쑥들꿩 수컷은 구애를 위해 목울대를 부풀리며 가슴을 튕기는 기묘한 ‘팝핑 춤’을 춘다. 죽을힘을 다해 경쟁적으로 춤을 추는 수컷들 앞에 암컷은 마치 관심 없다는 듯 소극적으로 군다. 

 

그런데 새를 가장한 ‘펨봇’ 로봇으로 이들의 습성을 연구한 결과 이러한 춤은 수컷끼리의 괴상한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암컷과 소통하는 과정이었다. 그 한 해 가장 많이 짝짓기를 한 산쑥들꿩(닉네임 딕) 수컷은 가장 요란한 춤꾼이었을 뿐 아니라 암새가 주는 미묘한 신호에 잘 반응하며 상대의 말을 ‘잘 듣는’ 매력적인 새였던 것이다. 이 연구는 여성이 무엇을 선택하는가라는 최신 진화론의 화두를 반영한다.

 

과학은 시대의 편견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2세기가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자연사 박물관의 모식표본은 여전히 대부분 철저히 수컷 위주이며 암컷을 대표하는 표본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다. 

 

생식기 연구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의 조류 생식기 연구자인 퍼트리샤 브레넌은 말한다. “과학에는 뜻밖의 재미가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질문을 하려면 이걸 살펴볼 여성이 있어야 하지요.” 암컷의 생식기가 출산을 위한 기관으로 거기서 거기라는 통념과 달리 동물의 생식기는 가장 진화가 빠른 기관이다. 

 

하이에나는 남성의 음경처럼 생긴 음핵을 통해 출산을 하고, 나선형으로 생긴 청둥오리와 돌고래의 질은 수컷의 음경을 차단하여 원치 않는 임신을 막는다. 집게벌레 암컷 역시 ‘저장낭’에 수컷의 정자를 보관함으로써 새끼의 친부를 결정하는 은밀한 선택권을 행사한다.

 

여성 생식기에 대한 연구는 번식과 진화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지는 여성의 선택이 진화의 또다른 엔진을 주도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한국사회의 심각한 젠더갈등은 저출산의 주요 요인으로 주목받지만, 암수 동물 사이의 성적 갈등은 성공적인 번식을 위한 진화의 엔진이 된다. 이 성적 갈등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가 바로 거미다. 

 

번식기의 황금무당 거미는 교미를 시도하는 수컷을 슬러시로 만들어 흡입해버리고, 수컷은 죽어가는 와중에 정자를 발사시켜 번식에 성공한다. 번식이 양성이 합심하는 조화로운 과정으로 설명했던 다윈에게 팜파탈과 같은 암거미의 존재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번식이 남녀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대립하는 이해의 줄다리기 혹은 성적 갈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전자를 전달하고자 하는 수거미와 양질의 영양분을 흡수해 건강한 알을 낳고자 하는 암거미의 목표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 모든 성적 갈등이 누군가에게 치우친 권력 구조에서 벌어진 것은 아닐까. 가부장적 사회가 아닌 암컷이 지배하는 사회는 좀 다를까. 귀여운 외모로 유명한 미어캣은 모계사회를 이루는 대표적 포유류인데, 여왕을 제외한 다른 암컷이 수컷과 짝짓기를 시도한다면 무리에서 퇴거당할 뿐 아니라 잔혹하게 살해당하기 십상이다. 하위 계급의 암컷은 자신의 새끼를 죽인 여왕의 자손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형벌에 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처럼 폐경을 하는 동물 중 하나인 범고래의 모계사회는 어떤가. 수십 년간 무리를 이끄는 나이 든 여족장은 자신의 생식 능력을 제한하여 젊은 암컷과의 경쟁을 피하고, 축적된 경험과 지혜로 무리를 이끈다.

 

저자는 동물을 이념의 무기로 휘두르는 것을 경계하지만 한편으로는 동물의 암컷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한다면 무엇이 자연적이고 정상이며 심지어 가능한가에 대한 오래된 기본 전제를 뒤흔들 수 있다고 믿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기원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은 영장류학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잔인한 개코원숭이의 문화는 남성 지배와 공격성을 설명했으며, 1970년대에는 침팬지가 인간 조상의 모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저자는 침팬지 사회에서 암컷의 권력이 과소평가되었다는 프란스 드 발의 목소리에 동의하며, 모든 권력을 거머쥔 그 어떤 알파 수컷도 배후에서 그를 밀어주는 암컷 킹메이커, ‘마마’가 없이는 무리를 지배할 수 없었다는 놀라운 발견을 주지한다.


이들 나이 든 암컷 침팬지는 모든 침팬지를 이어주며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모두가 찾는 중재자였으며, 암컷들의 우두머리로서 가족과 동맹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영장류 사회에서 권력은 신체적 우위뿐 아니라 경제적 레버리지(예를 들면 열매 위치를 아는 전문 지식, 번식에 대한 통제, 전략적 동맹 등)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이 ‘마마’의 존재는 수컷이 지배하는 히말라야원숭이와 버빗원숭이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됐다. 


기후재앙으로 인한 서식지의 변화는 암컷들의 진화 역시 가속화하고 있다. 하와이의 알바트로스 갈매기는 해수면 상승을 피해 새로운 서식지를 개척해 떠나면서 레즈비언이 되기를 감행했다. 수컷 개체수가 감소하면서 번식할 수 없게 되자 정자만을 기증받고 같은 암컷을 파트너 삼아 새끼를 키우게 된 것이다. 

 

동물원에 살면서 유성생식의 기회를 잃은 흑단상어, 코모도왕도마뱀, 그물무늬비단뱀 등이 수컷 없이 복제를 통한 단성생식을 했다는 뉴스도 심심찮게 전해진다. 환경이 파괴되고 생물 종이 재앙수준으로 감소하면서 멸종위기에 처한 톱상어 암컷은 자신을 복제하며 개체수를 늘려 나가고 있다. 

 

‘복제’라는 고대의 번식 기술이 자연계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미래는 모두 복제하는 성이 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은 행위의 기후변화 가해자로서의 인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자연계의 수많은 여성들은 생물학정 성 구분 자체도 고정적이지 않으며, 진화를 이끄는 힘은 어느 한 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유전자와 환경과 다양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낡은 분류방식에 순응하길 거부하는 암컷들의 진면목은 자연선택과 성선택, 사회선택이 복잡하기 뒤엉킨 진화의 메커니즘을 보여줄 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사회 시스템의 전략적 협력이 어떻게 성공적인 진화로 이어지는지 확인시켜준다. 

 

지배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성과 공감력으로 무리를 이끌고 지혜와 연륜으로 공존하는 사회 모델을 찾는 것. 생물학적 진실을 밝히는 싸움은 우리 모든 존재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첫걸음임을, 이를 위해 과학의 시선은 좀 더 다양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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