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는 죽지 않는다 다만 변신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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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는 죽지 않는다 다만 변신할 뿐

[흐르는시간 책의향기] 구멍가게 이야기
박혜진·심우장 지음, 책과함께 펴냄

[지데일리] 미지근한 사이다를 팔고, 종이가 바닥에 들러붙은 카스텔라와 10원짜리 크림빵을 팔았다. 연탄불 위에서 달고나 과자를 녹여 먹던 시절, 저 옛날 동네 구멍가게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다.


대형 마트에 밀려 구멍가게들이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어가는 요즘, 구멍가게는 머지않아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어질지 모른다. 간혹 오래된 동네의 골목 어귀를 지날 때 구멍가게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딱히 살 물건이 없더라도 그 모습 자체가 반가운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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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함께

 

 찬찬히 구멍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을 살피면, 조금은 침침하고 옹색한 구색 면면에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발견할 수 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양초 상자와 두루마리 휴지, 싸구려 과자와 낱개로 파는 라면들, 이제는 어느 집에서 쓸까 싶은 연기를 피우는 초록색 모기향 등. 

 

생활이 바뀌고 삶이 변했어도 여전히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그 시절의 살림 살이와 더불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사라져가는 우리들 삶의 소중한 구석들을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복기해낸 <구멍가게 이야기>는 다시금 그 시절의 추억 속을 거닐게 하며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저마다의 구멍가게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멍가게라는 공간이 그저 구시대의 추억거리에 불과한 걸까. 이런 의문을 가진 저자들은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우리의 일상 속에서 구멍가게가 있어온 모습, 구멍가게가 짊어져온 역할들을 되짚어보고 싶었다. 이렇게 시작된 ‘구멍가게 답사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자, 이를 바탕으로 얻은 새로운 생각들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구멍가게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각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경제적 측면에서 몰락해가는 골목상권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변화하는 유통환경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구멍가게를 꼽곤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구멍가게를 우리 일상의 일부로 기억하며 따뜻했던 행복이 서린 한 편의 동화 같은 추억으로 보는 시각이다.

 

저자들은 여기에 구멍가게의 인문학적 존재 방식을 더해 좀 더 입체적으로 구멍가게를 조명하고자 했다. 그 해법은 다름 아닌 '사람살이'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정하게 거리를 둔 타자의 시각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최적의 방법이 현장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과거 인터뷰 등을 통해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카이빙하는 학술 활동을 해왔던 저자들은 그렇게 잘 세팅된 ‘공식적’인 활동으로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이에 공적인 지원을 받지 않고 시골마을을 돌며 구석구석 숨은 구멍가게를 예고 없이 찾아 다녀보기로 했다.


이들의 구멍가게 현지답사는 2011년 11월부터 2014년 6월까지 진행됐다. 답사 지역은 전라남도로 한정했는데, 비교적 변화가 느린 농촌에는 아직 마을공동체가 살아 있어 오래된 가게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크다고 판단해서다. 

 

전남 지역 22개 시군에 위치한 구멍가게 백여 곳이 대상이었다. 마을공동체의 일원으로 마을과 일상을 함께해온 가게라야 의미가 있는 만큼 이삼십 년 이상 한자리를 지켜온 가게에 주목한 결과, 최종적으로 오십여 곳에서 가게 주인과 단골손님을 대상으로 깊이 있는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날것 그대로의 펄떡이는 진짜 이야기를 모을 수 있었다.

 

구멍가게는 막연하게 그렸던 처음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닳아빠진 문턱에 스민 숱한 사람들의 발걸음, 찌그러진 막걸릿잔에 밴 이야기들이 구멍가게가 단순히 아름다운 서정이 아닌 핍진한 생활의 현장임을 말해줬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는 중에 또 다른 많은 의문과 공백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주로 구멍가게의 현재를 있게 한 이전의 사회문화적 맥락이나 역사적인 변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다. 우체국·택배업체와 마을을 이어주는 운송대행사, 외상은 물론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 마을 은행, 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른들의 놀이판, 안주가 무상?무한 리필되는 술집 등, 마을공동체의 구심점이자 연결점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구멍가게는 마을의 멀티플렉스적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 모두를 아우르는 가치가 있다. 바로 마을공동체에 이야기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주민 누구나 스스럼 없이 들르는 곳이다 보니 마을의 ‘사랑방’이 되는데, 이를 통해 서로의 소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나아가 마을의 규칙과 가치를 유지하고 전승하는 장이 된다.

 

구멍가게가 마을공동체라는 네트워크의 중심인 셈인데, 공동체 내의 다양한 관계들이 연결되는 지점인 동시에 외부세계와의 연결이 이뤄지는 네트워크의 결절점, 즉 허브(hub)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마을은 닫힌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고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구멍가게의 이러한 역할과 위상은 감정과 이성을 적절히 통제하며 중심과 주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중간자의 역할을 잘해온 데 따른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가게 주인은 마을공동체의 일원에 속하면서도 거기에서 늘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주변인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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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구멍가게가 놓인 마을 안, 마을 입구, 학교 앞 등 물리적 환경을 따라가면서 위치적 특수성과 맞물려 가게가 담당하고 있는 고유한 역할들을 살펴봤다. 그런데 구멍가게의 역할은 변화하는 삶의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통시적 측면에서 구멍가게가 흘러온 양상을 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이에 구판장, 상회, 슈퍼, 마트,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구멍가게가 내건 다양한 상호에 주목해 이러한 간판의 이면에서 시대가 바뀜에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변화를 모색해온 구멍가게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봤다. 

 

나아가 본격적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좀 더 밀착된 시선으로 구멍가게를 관찰했다. 현실적 필요가 만들어낸 가게마다의 참신한 인테리어와, 과자·라면·담배 등 익숙한 상품들에 담겨 있는 생활문화사의 일면을 통해 구멍가게의 또 다른 의미를 찾아봤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사람살이로 모아진다. 답사를 마무리할 때마다 늘 도달했던 결론도 결국은 이 모두가 ‘삶’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삶의 현장으로서의 구멍가게에 주목, 구멍가게를 배경으로 치열하게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를 통해 마을공동체 내에서 구멍가게의 존재 의의는 물론, 구멍가게와 더불어 살아온 개인의 삶의 가치를 되짚었다.


구멍가게에 대한 다양한 면모가 보여지지만, 늘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정서는 가게 주인들의 고단함이다. 농촌마을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농사지을 땅 한 평 갖지 못해, 자식들을 돌보며 벌어먹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마지막 길인 경우가 많았다. 

 

동네 이웃이기도 한 가게 손님을 상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상 취객을 상대하는 일부터 외상값 받아내고 떼이는 일, 농번기면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진흙투성이 술참 손님들 등. 한편으로 1990년대 이후로 농촌 인구 감소에 따라 줄어가는 손님과 읍내에 들어선 대형마트 때문에 운영 자체가 힘들기도 하다.

 

저자들이 만난 사람들은 왠지 낯설지 않다. 아슬아슬하리만치 곡절 많은 가게 주인마다의 사연을 듣다 보면 안타깝고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이상하게 한 켠에서 힐링이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동질감과 공감일 터다. 이분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저마다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직면하고 그에 따른 고단함을 겪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어쩔 수 없음이, 그 물러설 데 없는 절박함이 또한 삶을 다시금 일으키는 힘이 돼 주기도 한다. 때문에 이 책은 ‘그렇게/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삶의 치유제이기도 하다.

 

저자들이 이 책을 펴내기까지의 과정에도 그러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2014년 답사를 마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건강 문제 등으로 하릴없이 중단되고 말았던 것. 

 

그러다 우연히 다시 찾은 구멍가게가 문을 닫거나 모습을 바꾼 것을 보고,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글줄에 쌓인 먼지를 쓸어낼 용기를 냈다. 그 사이에 세상은 질주만이 능사가 아님을, 이러한 오래된 것들의 가치가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깨달아가게 됐다.

 

하루가 다르게 더욱더 정확하고 빠르고 편리하게 변해가는 세상. 이제는 기술의 진보와 변화가 우리의 편의를 넘어선 느낌마저 들고, 도리어 그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급하고 불안하기까지 한 지금. 이 책은 려웠지만 함께 나눠 더 행복할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저마다의 자리에서 열심히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 자락 의미 있는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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