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BOOK돋움] '지구 멸망'인데 위로가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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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BOOK돋움] '지구 멸망'인데 위로가 되네

본지가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독서로써 마음을 힐링하는 '책 읽는 힘, BOOK돋움' 캠페인을 전개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일상생활이 멈춘 상황에서 마음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 생활이 최고의 기회라 여겨집니다. 독서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부모와 자녀 세대가 소통하는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며, 책 읽는 분위기가 잔잔한 물결처럼 번져 코로나 블루가 슬기롭게 극복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 이은진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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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는 ‘백조의 노래swan song’라는 표현이 있다. 백조는 죽기 직전 단 한 번 아름다운 소리로 운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로, 대개 어떤 사람이 마지막으로 이루어 낸 업적, 유종의 미를 거둔 성공을 일컫는다. (...) 모네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빛과 어둠, 꽃과 물을 화두 삼아 그만의 백조의 노래를 불렀다. 원래 오랑주리가 왕실 식물원 자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토록 정원을 사랑했던 모네가 자신의 유작을 전시하기에 그보다 더 안성맞춤의 장소도 없었을 것이다.'


한때 “지구가 멸망할 때 단 하나의 미술품을 구해 낼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세계 저명인사들이 저마다 다른 대답을 한 일화가 소개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미술 덕후’ 정시몬은 그들에 대적할 위트도 뛰어난 예술 지식도 없다. 하지만 그 질문에 망설임 없이 최애 작품을 고르는데 바로 '진주 귀고리 소녀'다. 사진인지 그림인지 헷갈릴 정도로 믿어지지 않았던 그 작품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서다. 

 

우리는 같은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까. 좋아하는 음식이나 노래, 영화에 관해 말할 때는 망설이지 않으면서 좋아하는 미술 작품을 묻는 말엔 괜스레 머뭇거려진다. 미술은 고상한 취미이며 예술적 지식 없이는 즐기기 힘들다는 인상 때문일 수도 있겠다. 


틈날 때마다 미술관을 방문하고 관련 책을 접하며 자연스럽게 미술 지식이 쌓이기도 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미술을 즐기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추어지만 오히려 미술을 더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 화풍을 이끈 쿠르베는 왜 종교화를 그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천사를 본 적이 없소. 천사를 보여 주면 천사를 그려 드리지”라고 응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품 '화가의 스튜디오'에선 시인 보들레르를 비롯해 그의 지인들이 상당수 등장하는데, 이들에 대한 해석에는 평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하지만 쿠르베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 다양한 인간 군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남긴 말처럼 그는 본 적 없는 천국과 지옥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 사는 현실을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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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 성향으로 유명한 티치아노는 “즉흥시로는 결코 완벽한 시구를 지어 낼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인물이다. 당대 유행하던 속성 기법을 따르지 않았으며 오래 공들여 완성한 걸작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그린 화가다운 명언으로 길이 남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고흐는 “밤은 낮보다 훨씬 풍요로운 색을 띤다”고 했다. '다비드상'을 조각한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속에 천사가 갇혀 있기에 돌을 파서 그를 해방시켰다”고 했다. 이렇게 작가들이 생전에 남긴 말들을 되뇌이며 그림을 보면 그들의 예술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음을 자각하게 된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늘 관심의 대상이 됐다.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겠으나 숨겨진 보석을 발견하듯 작자 미상의 작품 중 관심이 가는 작품을 찾아보는 것도 미술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은 저마다의 예술관이 녹아든 작품으로 세상에 오래도록 ‘말’을 건네고 있다. '호퍼 가문 여성의 초상'은 작가도, 그림 속 여성의 정체도 오늘날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강한 존재감으로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데, 그림 자체가 상당한 콘텐츠를 담고 있어 볼수록 흥미롭기만 하다. 


모델이 들고 있는 물망초의 의미도 남다르지만 그림 속 ‘파리’가 더 눈에 들어온다. 파리는 중세~르네상스 회화에서 삶의 유한함, 인간의 연약함 등의 상징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사람 목숨도 파리 목숨과 같을 수 있으니 평소 겸손하고 조심하라는 의미로 풀이되기도 한다. 


오랑주리는 ‘모네의 예술에 바친 영예의 전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네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의 작품은 다른 미술관에도 있는데 왜 유독 오랑주리 미술관에 그런 평가가 붙은 지 의문이 든다. 


슬럼프에 빠졌던 노년의 모네는 전례 없는 세계 대전을 목도하고 다시 붓을 들게 된다. 두 아들이 징집돼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그는 전쟁과 승리를 묘사한 그림이 아닌 물과 꽃을 묘사한 그림 '수련 연작' 8점을 탄생시켰다. 그토록 정원을 사랑했던 모네, 그의 유작은 왕실 식물원 자리였던 오랑주리에 전시돼 여전히 관람객들과 대화한다.


미술을 즐기는 방식에 하나의 정답은 없을 터다. <할 말 많은 미술관>을 통해 낯설기만 했던 미술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관람을 마칠 때면 미술에 대해 나름대로 ‘할 말’이 생길 수 있겠다. 특별한 미술 지식을 갖추지 않더라도 그저 좋아하는 작품 하나쯤 품겠다는 마음이면 되는 것이다. 


물론 미술관에 가는 게 삶의 의무 사항은 아닐 것이다. 거장들의 미술품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일상을 영위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편견과는 달리 미술관 방문은 무척이나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체험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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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라도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평생 이 모양 이 꼴이다. 멍청이들의 집단에서 조금 인기 있는 학생이라는 위치를 유지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이 좋으면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거리의 전문대에 입학하겠지. 운이 나쁘면 가까운 공장에 취직하고. 최악은 본격적으로 정신이 병들어 자기 한 몸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엄마를 수발하며 제일 가까운 이온마켓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것이다. 그중 무슨 길을 걷든 고등학교 동창들하고만 내내 어울리다 고향에서 인생 종 치겠지.‘


시골 촌구석 공업고등학교. 아버지의 폭력으로 힘든 보쿠, 철없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야구치, 학교에서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고 웃음거리만 되는 이와쿠마는 이 시골을 떠나 도쿄로 가고 싶은 인물이다. 


보쿠는 랩 데모 음원을 녹음하러 갔다가 지역의 유명 DJ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대마 씨앗을 손에 넣게 된다. 얽매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서 세상을 앞서가기 위한 수단은 돈뿐인라는 생각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 세 사람은이름뿐인 원예 동호회를 만들고 비밀리에 학교 옥상 비닐하우스에서 대마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주어진 현실을 탈피하는 수단으로 대마 재배라는 범죄를 선택한 아이들의 마음 저변에는 좋은 어른의 부재로 인한 기댈 곳 없는 외로움과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실망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이 당한 폭력에 대처하기 위해 못 미더운 어른들에게 기대려 하거나 무작정 도덕에 호소하지 않는다. 오롯이 자기 손으로 더 확실한 돌파구를 찾기로 한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도쿄에 가는 것이다. 이들은 현실의 우중충한 모습만 보고는 연상할 수 없는 특별한 꿈을 지니고 있다. 보쿠는 자신을 프리스타일 랩으로 표현하는 지역 사이퍼에 참가하면서 언젠가는 음원을 내고 디제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슬래셔 무비와 고어 무비를 꿰고 있는 야구치는 도쿄로 가서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목표다. 중학교 때부터 만화 연구부에서 어설픈 표절작이나마 습작을 하곤 했던 이와쿠마는 만화의 스토리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사는 도카이촌에서 꿈꿀 수 있는 최선의 미래는 지역 전문대학에 진학한 뒤 토착 기업의 공장에 취직하는 것인데,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은 미래는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가장 가까운 마트의 직원으로 일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이들에게 꿈은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가 뻗칠 수 없는 순수한 성역인데, 이들이 도카이천에서 벗어나 도쿄로 가고 싶은 중요한 이유는 자유롭게 꿈을 이뤄가고 싶어서다. 그렇기에 도쿄에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미키 도의 <우리들의 비밀 온실>은 범죄의 칙칙함은커녕 여름날의 빗방울을 맞은 비닐하우스와 같이 줄곧 청량한 청춘소설 분위기를 보여준다. 아이들은 금새라도 추락할 수 있는 일탈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이나 불안함이라고는 없이 미래를 향해 달려가기만 한다.  


고등학생 게이 커플이 사랑을 나누기 위해 온실에 숨어들었다가 들키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대마 판매의 연락책 역할을 하게 되거나, 닌자의 칼 ‘마체테’가 대마 수확에 쓰이게 되는 등 곳곳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가 포진해 있어 심각하면서도 가벼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골 촌구석 공업고등학교, 남자들만 가득한 환경에서 비전을 찾지 못한 세 여고생이 우연히 대마 씨앗을 손에 넣는다면이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평가받고 선택되는 객체가 아닌 인생의 주체로서 바로서려는 아이들의 분투는 우리 삶이 지나온 한 부분씩을 닮아 있어서 아련한 마음을 샘솟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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